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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언니, 김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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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삼성생명에는 한 언니가 있다.

그 언니는 코트 위에서 정말 정신없이 뛰어다닌다. 신입생 시절부터 그랬다. 그 언니를 대변해주는 단어는 열정과 투지였고, 때로는 그런 것이 지나쳐 선수들과 충돌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나이를 먹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코트에서 노련하게 경기를 조율하기보다는, 배터리가 방전될 때까지 계속 돌아다니는 장난감 자동차처럼, 쉬지 않고 정신없이 코트를 가로질렀다.

그래서일까? 

연차가 많이 쌓인 베테랑에게 습관처럼 붙는 “농구를 알고 한다”, “여우같이 농구를 잘한다”는 말은 그 언니와 호환되지 않았다. ‘참 열심히 하는 선수’라는 말이 전부였다.

지난 2월 27일부터 열린 KB국민은행 Liiv M 2020-2021 여자프로농구 플레이오프 경기.

그 언니는 평소처럼, 아니 평소보다 더, 그렇게 감긴 태엽이 고장 나, 무한히 돌아다니는 장난감 병정처럼 코트를 가로지르며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자신보다 14살 어린 선수를 막다가 뒤로 나뒹굴었고, 흐르는 공을 줍기 위해 코트에 가장 먼저 몸을 던지는 가장 나이 많은 선수였다. 라인 밖으로 나가는 공을 살리겠다고 몸을 던졌다가 광고판에 젖은 빨래처럼 걸려 있기도 했다. 어리고 큰 선수들한테 공 한 번 양보하는 걸 그렇게 싫어했고, 바닥에 같이 누워서는 앙칼지게 공을 뺏어냈다. 제 몸도 못 가누면서, 우리 편 동생들이 넘어지면 제일 먼저 달려가 일으켰다.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뻗은 손에 파울 판정을 받고 코트 밖으로 쫓겨나 머리를 쥐어뜯기도 했고, 경기 후 MVP로 뽑혀서는 ‘마지막 경기’를 언급하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생각을 해 보니까,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일 때... 그러니까 평균 득점 20점씩 기본으로 하고, 청소년 대표에 뽑히던 그 시절에... 지금 같이 뛰는 애들은 운동도 시작하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더라고요. 제가 프로에 온 다음에야 운동을 시작했겠죠? 갑자기 ‘프로선수인 내가 초등학생이랑 시합하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몰라...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고등학교 시절의 나처럼 해보자는 생각으로 코트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내용은 그냥 프로에 와서 잘하지 못했던, 그냥 제 모습이었네요.” 

 


휘청거리면서도 코트에서 버티고 또 버티던 그 언니는 교체 때마다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야 했고, 벤치에 앉아서는 동료의 안마를 받기도 했다. 전장과도 같다는 단기전의 코트에서 어쩌면 민폐인가 싶을 만큼 손이 참 많이 가는 그 언니. 하지만 그 언니는 이 시리즈의 처음과 끝에 계속 존재했다. 

상대는 정규리그 1위 우리은행. 

WKBL에 존재하는 6개 팀 중 5개 구단의 유니폼을 입어본 그 언니가 프로에 들어왔을 때 처음 몸담았던 그 팀은 이 리그에서 가장 강력한 몸싸움과 투지, 적극적이고 거친 플레이를 마다하지 않는 팀이다. 

누군가는 “그들의 림 밑에서 리바운드를 한 번 잡으려면 2~3대는 얻어맞아야 한다”는 말도 했다. 삼성생명 역시, 겁 없이 달려드는 그들의 패기에 밀려 기선을 제압당해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고배를 마셨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 언니는 제일 먼저 뛰어나갔고, 제일 먼저 부딪쳤고, 제일 먼저 나뒹굴었다. 온몸으로 동료들을 지탱했다. 

 

서른다섯 살. 

양대 리그 시절 포함 WKBL에서 열아홉 번째 시즌을 보내고 있는 그 언니의 몸부림은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상대의 투지마저 증발하게 했다. 

플레이오프 3경기, 2승 1패. 패했던 첫 경기조차도 흐름을 주도했던 것은 4위 팀 삼성생명이었다. 온몸을 던진 그 언니의 투혼을 앞세워, 삼성생명은 리그 1위 팀의 기백에 밀리지 않았다. 

32분 14초. 9점 4리바운드 2어시스트 4파울. 

어쩌면 마지막 플레이오프일지도 모르는 경기에서 그 언니가 남긴 기록. 준수하지만, 화려할 것도 없다. 

하지만 큰 감흥 없는 이 숫자가 4위 팀이 1위 팀을 꺾고, 이 시즌의 최강을 가리는 마지막 고지에 올라서도록 만들었다.  

그 언니 김보미. 

‘선수’라는 이름의 마지막을 향해 시한부처럼 달려가고 있는 프로 16년 차 맏언니의 투혼은 삼성생명의 팀 정신, 그 자체였다. 

“그냥 죽을 거 같았어요. 내 인생에 게임 뛰다가 과호흡 온 건, 오늘이 처음이었어요. 뭐 그전에는 과호흡 오기 전에 감독님들이 빼주신 거죠. 챔프전이요? 무조건 이기고, 우승하고 싶어요. 그때도 이렇게 뛸 수 있냐고요? 몰라요. 그냥 끝까지 뛰는 거죠, 뭐. 저한텐 내일이 없어요. 뛸 수 있을지 어떨지는 내일 눈 뜨고 나서 생각해볼게요.” 

용인 삼성생명에는 그런 언니가 있다. 

 

사진 : 이현수 기자 / 2021년 3월 4일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398&aid=0000044626


작년에 쓴 기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이거였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꼭 써야만 할 것 같았다.

 

재활 초기 환자처럼, 걸음을 내딛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던 그에게, 플레이오프 이후 매 순간 순간은 '선수 김보미'의 마지막 장면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결말은 해피앤딩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어찌되어도 승자 이면의 그림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적어내야 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꾸준했고 성실했던, 묵직한 연대기의 마지막을 누구라도 기록을 해줘야 한다고, 그렇게 믿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어렵게 내딛던 그는 뜻밖에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르러 자신이 원했던 결과를 얻었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그리고 또 다른 매체들도 그들이 만든 기적을 '스포츠'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찬양했다. 하지만 그 우승은 결코 스포츠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성과가 위축되는 것은 아니다. 

 

농구는 팀 스포츠다. 그러나 내게 2021-22 시즌은 여전히 업셋을 완성했던 블루 언더독들보다, 자신의 현역 마지막 장면에 림 그물을 찢었던 이로 더 기억된다.

 

김보미는 챔피언 반지를 갖고 은퇴할 수 있게 됐다. 우승 확정 후 기쁨에 겨워 너무나도 잘 뛰어다니던 그를 보며 기사를 쓴 내가 '속은 건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짧았던 두 주간의 플레이오프 세계관에서 그는 완벽한 신스틸러였고, 어떤 결과를 얻었어도 연말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기에 부족함 없는 존재였다.

 

한 시즌이 지나서 현재.

 

그가 몸 담았던 삼성생명은 지난 시즌 정규리그보다 더 무기력하고, 작년과 같은 드라마를 쓸 힘도 없어 보인다. 긴 휴식기 이후 재개된 마지막 라운드의 처음 2경기를 모두 잡아, 플레이오프 진출 가능성은 높였지만 여전히 이 팀에 대해서는 희망적인 신호가 많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봄의 기적을 썼던 경험은 있지만, 우승의 DNA를 스스로 생성하기에는 부족함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전력이 모자라고 이 부족함을 넘어설 무형의 힘이 보이지 않는다.

 

한편, 이제는 유니폼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경기운영본부) 부장님이 되신 김보미는 여전히 코트에 있다. 코트 밖의 그녀는 선수 때보다 더 커 보인다. 이유는 모르겠다. 현역 시절, 스포트라이트의 중심보다는 주변에 있었던 그가 선수로서의 마지막까지 치열했고 성실했음을 인정받은 것 같아서, 그래서 그 모든 스토리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새 시즌의 마지막. 올해도 또 다른 '그 언니'가 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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