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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ize/dReam hunting

2010년 남자 셋이 떠나는 전국일주 #7 경남 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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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일주를 한다고 치면 당연히 부산과 전라남도 해남의 땅끝마을을 들르는 게 맞는 수순 같은데, 뭔가 남들과 달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지 우리의 일정은 국토의 남쪽 끝까지 내려가지는 않았다. 그때는 일정을 고려하고 차별성을 생각해서 상당히 참신하다는 느낌이었는데 (물론 계획 자체를 나 혼자 짜긴 했다.) 돌아보니, 그래도 부산과 땅끝 마을은 들르는게 맞았다는 느낌이 든다.



내 아버지의 고향을 들르다.

경남 하동


어찌보면 우포늪에서 순천만으로 가는 길목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법하다. 경남 하동을 떠올리면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은 쌍계사와 함께 벗꽃길을 들 수 있을 것이고, 또 하나는 화개장터다. 하지만 내게 경남 하동은 아버지의 고향이고, 매년 내가 시제를 모시기 위해 늦가을 (혹은 초겨울) 에 내려가야 하는 곳이다. 아버지의 고향이기에 내게도 그냥 고향이라는 이름이 막연히 강한 바로 그 곳이다. 30여년을 살면서 수차례 들렀던 곳이지만 가족과 동행하지 않았던 것은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길을 따라 가는 이동하던 중, 하나미 형님이 잠깐만 차를 돌리자고 하셨다. 강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이색적인 풍경을 보셨단다. 하동이 처음인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선 풍경이었을까? 그것은 섬진강 특산물 중의 하나인 제첩을 잡는 분들의 모습이었다.



어짜피 나는 망원렌즈를 마운트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라이카를 쓰는 조르바에게 망원은 금지어였다. 1000만원이 넘는 바디인 M9은 모시고, 조르바는 맨발로 바지까지 걷어 붙이고 제첩을 잡는 분들을 담고자 접근했다. 하지만 촌의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었던 이분들께 외지의 카메라는 수줍음이었다. 제첩을 잡으시는 와중에도 이 분들은 꾸준히 조르바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셨고 조르바는 의도하지 않게 이분들을 방해한 셈이 되어버렸다.



섬진강변의 식당에서 제첩을 아침으로 먹었다. 우포를 떠나 하동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 가량이었다. 일어난지 한참된 시간이었지만 아침을 먹기에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니었다.일어난지 한참 지났는데도 늦은 아침식사가 아닌 경우... 내게는 참으로 낯선 경험이다.




하동에 가면 특이한 곳이 하나 있다. 바로 토지문학관과 드라마 토지 세트장 등이 그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류작가인 고 박경리선생이 집필한 대하소설 토지가 바로 하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경리 선생은 26년간 토지라는 소설을 집필하면서도 막상 그 배경이 되었던 하동에는 방문하신 적이 없다고 한다. 통영 출신인 박경리 선생은 고향을 오가는 길에 봤던 하동을 소설의 배경으로 삼았던 것이지, 막상 이곳과 특별한 연이 닿은 적도 없었고, 집필 활동을 한 곳도 강원도쪽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박경리 선생의 토지라는 작품으로 말미암아 하동이라는 이름이 유명세를 탄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소설의 배경이되는 악양, 평사리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는 소설에 등장했던 최참판댁이 복원되었으며, SBS에서 이 드라마를 다시 방영하자, 그 주변으로 드라마 세트장을 지었다. 일부 사람들은 토지의 등장하는 최참판이 실존인물인 줄 알고 있기도 하지만, 하동에 그런 사람은 없었고, 실제로 만석꾼이 나올 수 있는 조건도 아니라고 한다.



완전 편하다. 토속적으로 보이는 저 옷은 토지마을 이라고 부르는 드라마 셋트장의 기념품 가게에서 살 수 있는 옷이다. 저렴한데다 통풍도 잘되고 완전 편하다. 조르바와 나는 저걸 구입하고 입고 다니며 좋아했지만, 오히려 이 옷과 가장 잘 어울리는 하나미 형님은 끝끝내 구매를 거부하셨다.



토지 세트장에서 내려다본 평사리 벌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논 한 가운데에 위치한 소나무 두 그루이다.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이름 난 곳이기도 하고, 일부 사진, 여행 관련 책에서는 저 나무 두 그루를 '부부송'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저 곳은 우리 고조 할머니의 유택 (무덤) 이다.

항상 잡초가 무성히 자라고 특별히 봉분과 비석을 하지 않아 눈에 띄지 않지만 두 그루의 소나무 바로 앞에는 할머니의 묘가 있고, 매년 시제를 모실 때 마다 선산에 유택이 없는 관계로 따로 한 번 더 저 앞에서 제를 올리곤 한다.

저 곳은 원래 논이 아니라 전체가 솔밭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제시대 때 나무를 베어가면서 남은 것이 겨우 저 두 그루 뿐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지금은 저렇게 운치있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을 지 모르지만 애초에 저 나무는 하동군의 상당한 애물단지였나보다. 논 한 가운데 위치한 탓에, 헬기로 농약을 뿌릴 때 방해가 된다며 베어버리라는 연락이 수도 없이 왔었다. 그러나 KBS에서 토지를 드라마로 방영하면서 오프닝 영상에 저 벌판이 항상 등장하게 됐고, 그 후 소나무가 유명세를 타자 이후에는 그런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언젠가는 하동군청 홈페이지에 사진이 오르기도 했고, 하동 농협에서 판매하는 작설차의 광고에도 당당하게 하동의 상징으로 소나무 두 그루가 떨렁 박혀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사용하고 있는지는 집안 어르신들 중 누구도 몰랐다. 아버지께 여쭤보니 당연히 저 유택과 주변, 소나무는 우리 사유 재산이라 하신다.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우리 집과 관계된 무언가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상당히 뿌듯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된다는 것.. 그리고 어디선가는 소설 토지속에서 이루지 못한 서희의 사랑을 암시한다는 말도 안되는 설명까지 친절히 주석으로 달고 있는 것을 볼 때면 씁쓸하기도 하다. 부부송이라 불리우나 본데, 과연 누가 언제부터 그렇게 명명해준걸까? 고맙기도 하면서 와전 혹은 왜곡의 시작이었던 거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저 곳에 묻히신 할머니의 사연을 안다면 과연 애틋한 사랑, 부부송이라는 이름을 감히 가져다 붙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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