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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ize/oTaku

[일드] 신은 만인 앞에 평등하지 않다 - 백야행 (白夜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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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는 행복했으면 하는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이 정말 행복해진다면, 이세상에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어져 버리게 돼요.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가 집필한 동명의 원작 소설을 드라마로 제작한 백야행은 진행 내내 행복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작품이다.

'정의(正義)'에 대한 올바른 해석, 그리고 ‘신은 과연 만인 앞에 평등한 것인가?’에 대한 진부한 역설까지, 많은 요소에 부정적인 장치가 내내 작품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1866년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Dostoevskii)는 <죄와 벌, Crime and Punishment>에서 '도덕과 법에 구휼되는 것을 뛰어넘은 비범인은 선한 목적과 결과를 위해, 악한 과정과 방법을 사용해도 괜찮다'는 논리의 주인공을 구원받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백야행>에 등장한 료지와 유키호는 사상적인 논리와도 거리가 멀다. 이들이 삶에 대한 논리를 설계해야 했을 때의 나이는 고작 11살이었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교환살인'이라 명명한 서로 간의 존속살인을 통해 그들은 참담한 굴레에서 벗어나 그저 살아남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범죄를 저지른 그들에게 그런 마음은 사치에 불과했고, 그것은 공소시효 만료 1년을 앞둔 상황에서 벌어진 료지의 죽음으로 증명되었다.

'정의'에 대해 묻게 된다. 

<백야행>은 존재 자체로 꾸준히 어둡고 음침하며,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행복하지 못한 공간을 제공한다. 그나마 사회적으로 가장 정의롭다 말할 수 있는 인물인 사사가키 형사를 등장하지만, 주인공 관점의 구현에서 그는 확실한 악역으로 부유하고 있다. 사치가 되어버린 소박한 간절함을 끝내 방해하고 무너뜨리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주인공 중심의 관점 탓일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사사가키가 발휘한 필요 이상(?)의 정의감이 아니었다면 료지와 유키호가 그토록 불행해질 수 있었을지에 대해. 

료지와 유키호는 18살 이후 살아남기 위한 추가범죄를 연거푸 저지르고 만다. 하지만 유키호가 보여준 돈 있는 남자와의 결혼에 대한 집착을 제외한다면 그들을 각박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들 스스로라기 보다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환경이었다. 그리고 사사가키의 정의감 역시 그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가 되고 만다. 사사가키의 정의감은 과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그것을 우리는 '공익(公益)'이라 할 수 있을까?

일본 드라마 <유성의 인연>에서도 공소시효와 처절하게 싸우는 세 남매가 등장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범인을 잡고자 공소시효와 싸웠다는 것으로, 백야행과 대조를 이룬다. 

행복과 필요에 관한 문제다. <유성의 인연>에서는 반드시 범인을 잡아야하는 절박한 심정의 피해자 가족이 등장했다. 반면 <백야행>에서는 공소시효와 관련해 더욱 처절하고 절박한 두 주인공이 존재했고, 차이는 단지 그 뿐이었다.

사사가키의 정의는 어쩌면 본인 스스로의 만족에 의한 것이었을 뿐, 결과적인 '공익(公益)'에도 그다지 도움될 것이 없었다. 이를 집착이라고 표현한다면 공권력에 대한 무례일까? 살인사건과 관련해 가장 가까운 피해자들 역시 그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을 원치 않았고, 결국 그것을 파해쳐낸 것은 사사가키와 제 3자들이었다.

다시 묻게 된다. 사회적 정의와 진실이 반드시 정의인 것인가?

"11살 당시의 그들을 잡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사사가키의 외침처럼, 그 때 잡지 못했다면 놓아주는 게 오히려 정의였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단지 안타까움이 만든 '타협'이라고 보기에는 왠지 부족함이 남는다.

료지와 유키호는 끝까지 신 앞에 평등한 존재로 바로 서지 못했다. 그들은 끝없이 평범함을 위해 발버둥쳤고, 살아남고자 애썼다. 그들은 예전처럼 '낮에 손을 잡고 거닐고 싶다는 것' 하나를 위헤 15년을 숨어살겠다고 결정했다. 11살 어린 나이에 내린 그들의 처절한 삶의 투쟁은 결국 14년이 지나서 실패로 낙인찍혔다.

"태양 아래서 걷고 싶지만 태양은 우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료지의 독백처럼, 결국 그들은 심판받았다. 그리고 굳이 사사가키가 아니었더라도, 2006년 11월 11일을 함께 맞았더라도, 그들은 분명 "행복"이라는 단어의 범주 밖에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밤이었지만 결코 어둡지만은 않았다"고 했다. 서로가 서로에서 태양이었기에, 11살 당시의 사건 이후 그들의 삶은 서로가 서로를 비춰주는 어둔 태양 아래의 <백야행>이었다. 그들이 신에게 허락받은 자비는 이것이 고작이었다. 겨우 이 정도로 그들의 삶을 타인에 비추어 신 앞에 평등했다고 말하기는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를 다시 풀기에는 너무 많이 지나쳐버린 두 사람. 그리고 결국 이들의 운명적인 도주는 료지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료지의 죽음은 사건 자체를 종료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사가키의 정의감 역시 증발시켰다. 료지는 결국 세상에서 지워졌고, 그 세상에서 유키호는 반드시 행복해야만 한다는 불가능의 숙제를 떠안게 되었다.

정의를 위해 범인을 찾아 사건의 전모를 알아 낸 사사가키도, 서로를 밝은 곳에서 걸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들고 싶어했던 료지와 유키호도, 결국은 커다란 불행에 갖혀버린 채 무책임한 종결을 맞았다.

신은 만인 앞에 평등하지 않았고, 굴곡된 인생은 잘못된 첫 단추를 다시 꿰기에는 용서의 시간이 너무 촉박하며, 세상은 자신의 일상을 위해 타인의 행복을 언제라도 침탈할 수 있다는 굴절 속에 <백야행>은 존재했다.

료지가 치열하게 싸워야 했던 과거는 살인이 아니라 아버지가 행한 유키호에 대한 성폭행이었다. 살인이라는 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보다 중요했던 것이 유키호의 비참한 과거를 묻어버리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이 내게는 면죄부"라는 말은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서로 함께 하는 공생이었지만 상리공생이라기 보다 편리공생에 가까웠고, 어찌보면 유키호로 인해 더욱 희생하는 듯 보였던 료지. 하지만 R & Y 라는 그녀의 샵의 이름을 보면 시종 가슴이 먹먹해질 수 밖에 없다.

범죄는 어떻게도 정당화 될 수 없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법과 질서로 한정지을 수 없는 그 이상이 존재한다. 집필하는 작품마다 영화 또는 드라마로 제작되는 인기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원작 <백야행>은 일본에서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되었고, 국내에서도 영화화 된 바 있다. 하지만 이들 중 지난 2006년 1월, 야마다 타카유키, 아야세 하루카 주연으로 제작된 일본 TBS 1분기 드라마 <백야행>을 최고로 꼽고 싶다.

"내 위에 태양같은 건 없었어. 언제나 밤. 하지만 어둡진 않았어. 태양을 대신하는 것이 있었으니까. 태양만큼 밝지는 않지만, 내게는 충분했어." - 유키호

"백야란게 말이야. 밤을 도둑 맞은 걸까, 낮을 선사받은 걸까. 밤을 낮처럼 보이게 만드는 태양은 악의인 걸까, 선의인 걸까." - 료지

 

문화저널21 / 2012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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