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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에세이-필터리스] “야! 나, 변연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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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를 결정지어야 하는 4쿼터 박빙의 상황. 마지막 공격권은 우리 팀이 쥐고 있다. 샷 클락은 이미 꺼졌고, 드리블을 시작한 가드는 하프라인을 넘어섰다. 분주한 정적이 지배하는 모순 속의 긴장감이 존재하는 마지막 순간에, 수비와 스크린 사이를 돌아 한 명의 선수가 외곽 빈 자리로 돌아 나왔고 완벽한 오픈 찬스를 잡았다. 그리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이 경기의 마지막 슛을 시도한다. 
자, 치열했던 승부에 대한 모든 책임을 떠안아야 할 이 마지막 슈팅의 주인공. 당신이라면 이 주인공이 누구이기를 바라겠는가?
‘인터뷰’를 기획하면서 늘 고민하게 되는 것이 있다. 모든 기자들이 마찬가지겠지만, ‘독자에게 무엇을 주고자 하는가’, 그리고 인터뷰이(interviewee)의 ‘어떤 점’을 ‘어떻게’ 부각시킬 것인가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때로는 인터뷰이가 내게 진실할 수 있도록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 지와 함께, 인터뷰를 위해 귀한 시간을 할애해 준 그들과의 대화를 담아내는 방법도 고민하게 된다.
여자농구에서 마지막 클러치타임에 공을 잡았으면 하는 선수. 그것은 아마도 ‘십중팔구’ 변연하(KB스타즈) 일 것이다. 변연하에 대한 인터뷰를 정리하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최대한 ‘여과 없이’, 그녀가 한 말을 정말 토시 하나 빼먹지 않고 그대로 옮겨놓겠다고 마음먹었다. 소위 ‘쉴드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야 변연하라는 선수가 갖고 있는 캐릭터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고, 농구에 대해 당당하면서도 도도한 ‘선수 변연하’의 자신감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손대범 편집장도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여과 없이’라는 느낌을 살리기 위해 제목에 ‘필터리스’(Filterless)라는 이름을 썼다고 하자, “새로 나온 담배에요?” 라고 묻는다. 역시, 그는 농구를 제외하면 다른 모든 부분에서는 평균 이하의 남자다. 심지어 골초다.
‘참으로 식상한 선수’ 변연하 
사실 변연하의 인터뷰는 식상하다. 프로 몇 년차인지 계산하기도 귀찮을 만큼 오랫동안 프로에 있었고, 국가대표로도 오래 활약했다. 남들에게는 무척이나 영광스러운 이름인 국가대표가그녀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한 이름이다. 변연하에게 처음 국가대표를 달았던 게 언제였는지 물어보면 선뜻 답을 못한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게 아마...”라고 입을 떼고는 “... 였던 것 같다”라고 마무리 한다. 본인도 잘 기억을 못한다는 거다. 그렇게 오랫동안 최고의 선수로 활약한 덕분에 수없이 많은 인터뷰를 했고, 정중하고 연차에 맞는 노련한 대답들을 이어왔다. 지난 시즌에도 그랬다. 모범적인 선수생활을 해 온 선수답게 교과서와 같은 대답을 해줬다. 그래서 그녀의 인터뷰는 재미가 없다. 그러나 변연하는 충분히 재미있고, 도발적이고, 코트에서 보여주는 실력만큼 (어떤 의미에서는) ‘무서운’ 사람이다. 농구 기자계의 ‘얼짱’을 꿈꾸는 점프볼의 최창환 기자는 변연하에 대해 사석에서는 ‘무서운 누나’ 라고 말한다.
변연하는 본인도 자기 인터뷰가 재미없는 걸 안다. 인터뷰 제의를 꺼내자마자 단칼에 하지 않겠다고 한다. 인터뷰보다 술이 좋단다. “우리 팀에 대세인 (홍)아란이, (심)성영이 있잖아? 걔들 해. 난 퇴물이야”라며 하기 싫다고 한다. 그래... 사실 나도 걔들이 더 좋다. 그런데 거긴 이미 했다.
지난 시즌을 마친 후, 서울의 강남 모처에서 만났던 변연하는 시즌에 대한 아쉬움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정규리그를 비록 3위로 마쳤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우승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 지난 몇 년 간 KB스타즈를 저승사자처럼 괴롭혔던 신한은행을 상대로 가장 좋은 경기를 펼친 시즌이었고, ‘통곡의 벽’이었던 와동체육관에서의 징크스도 넘어섰다.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한 우리은행 역시 지난 시즌 KB스타즈를 상대로 가장 어려운 경기를 펼쳤다. 그러나 변연하의 기대와는 달리, KB스타즈의 플레이오프는 단 두 경기로 끝나고 말았다. 신한은행과 만난 KB스타즈는 안산에서의 1차전에서 74-77로 패했고, 안방에서 벌어진 2차전도 80-87로 내주며 시즌을 마치고 말았다. 
1Q. 2013-14 플레이오프 1차전
변연하로서는 1차전이 특히 아쉬울 법했다. 3점차로 뒤진 상황에서 KB스타즈는 변연하에게 마지막 공격을 맡겼고, 변연하는 3점 버저비터를 시도하며 동점을 노렸다. 그러나 슛은 불발됐다. 그러나 대다수 KB스타즈의 팬들은 변연하를 탓하지 않았다. 여전히 팀의 1번 문제가 온전히 해결되지 않았음을 지적한 많은 팬들은 최윤아를 앞세운 신한은행에 밀린 가드진 때문에 1번 역할까지 해야 했던 변연하가 체력적으로 많이 힘든 상황이어서 마지막 기회를 살리지 못했던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변연하에게 이러한 반응을 전해봤다.
“참 좋다. 남들이 내 핑계도 대준다. 내가 이래. 봤지?”
말만 “좋다”다. 뾰족했다. 모가 나있다. 불만이 가득했다.
“오빠! 슈터는 1분을 뛰든 40분을 뛰든, 지가 넣어야 될 때 넣는 게 슈터야. 제일 중요한 걸 못 넣었는데 무슨 말을 하니? 그냥 못 넣었으면 못 한 거야. 그게 슈터니? 그런데 이젠 못했는데 욕도 안 먹네...”
상대적으로 가드가 약해서 1번 역할까지 하느라고 체력적으로 힘들었다는 부분은 어떨까? 실제로 변연하는 2012-13시즌까지는 아예 1번 포지션으로 경기에 나서기도 했었다. 1번 포지션이 안정되지 못했던 KB스타즈의 고육책이었다.
“나는 우리 (홍)아란이랑 (심)성영이가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거든. 시즌 시작하기 전에 걔들이 그만큼 할 거라고 누가 생각했어? 걔들 뭐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시즌 전에 걔들 이름이나 제대로 알았던 사람들 얼마나 돼? 아란이 경기 뛴 지 2년째고, 성영이는 1군이 처음이었어. 솔직히 코칭스태프도 얘들이 기대이상이었다고 생각할걸? 그런데 얘들보고 최윤아 만큼 못한다고 뭐라고 하는 거잖아.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되면 이[미선, 변연하는 왜 필요하니? 그냥 다 그렇게 뚝딱 되라고 하지. (이)승아나 (김)규희나 얘들보다 먼저 기회잡고 1군 뛰고 하니까 늘었던 거고... 얘들도 눈에 띄게 늘었잖아. 시즌 초에 아란이가 그렇게 안했으면 우리 플레이오프 못 갔어. 우리 애들 잘했어.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애들 너무 잘했고, 다음 시즌에도 올해처럼 늘면 되는 거야. 또 그렇게 늘 거고... 난 칭찬해 줄 거야.”
문제는 변연하가 팀 내 어시스트 1위라는 거다. 경기당 3.8개의 도움으로 풀타임 주전으로 나서 팀의 포인트가드를 맡았던 홍아란(1.54개)보다 2배 이상 많다. 
“그런데 그래서 난 욕먹었잖아. 태업한다고! 감독이랑 싸우냐고! 뭐래더라, 무슨 불화설? 너도 기사 썼지?”

 

2Q. 변연하는 득점을 상징한다
갑자기 화가 치미나보다. ‘오빠’라고 하더니 갑자기 ‘너’란다. 
지난 시즌 초반, 변연하의 득점이 저조해지자 서동철 감독의 농구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과 함께 주득점원인 변연하의 득점 저하는 KB스타즈에게 치명적이라는 분석이 이어졌다. 또한 이 시기, 강아정의 득점도 살아나지 않으며 팀 득점이 외국인 선수인 모니크 커리에게 의존하는 모습이 나타나자, 서동철 감독과 변연하와의 불화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박)정은 언니(삼성생명) 봐봐! 그 언니, 은퇴시즌 까지 계속 주전 뛰었는데, 마지막까지 득점을 계속 해준 게 아니거든. 수비랑 리바운드, 어시스트 더 해주고 궂은 일 하면서 애들 다독여주고, 필요할 때 한방 터뜨리면서 끌어가줬단 말야. 솔직히 나도 그런 역할을 해주는 게 맞지 않나 생각했는데, 난 바로 불화설 나오더라. 박정은은 되고 변연하는 안 되는 거지. 난 아직 정은 언니 급이 안 되는 거야.”
경기 후 수훈선수 인터뷰에 나서면 ‘예의 바르게’ 전형적인 인터뷰를 몇 년 째 하고 있지만, 변연하는 분명 자신이 국내 최고의 클러치슈터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 선수다. 쉽게 말해 ‘농구에 있어서 자신이 잘난 선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지난해 태국 방콕에서 열렸던 ‘제25회 FIBA 아시아 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도 변연하는 중국과의 경기 승부처에서 상대의 타이밍을 완벽하게 무너뜨리는 3점슛을 성공시키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경기당 16.2득점으로 대회 득점 2위에 올랐다. “그런 슛은 어떻게 하면 성공시킬 수 있는 거냐”고 묻자, 웃으며 “나, 변연하야”라고 대답했던 선수다. 그런 변연하가 스스로 ‘부족하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그것이 설령 사실이라 해도 뭔가 어색하고 자연스럽지 않다. 그렇다면 박정은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연하는 득점력이 정말 뛰어난 선수라서 다른 능력들이 득점 때문에 과소평가 되어 있어요. 저랑 비교해도 득점력은 진짜 특출한 아이거든요. 그래서 다른 걸 잘해도 득점이 줄어드니까 말이 나왔던 거죠. 그런데, 저는 그런 얘기가 나왔을 때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요. 제가 아는 연하는 적어도 코트 안에서는 누구보다도 영리한 선수에요.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너무 잘 알아요. 경기를 할 때는 물론 훈련을 할 때도요. 불만이 있다고 불화설을 일으키고 태업을 하는 선수가 절대 아니에요. 그런 얘기가 돌 때도 저한테 연하는 그냥 가장 위협적이고 무서운 상대팀 선수였어요.”
박정은 코치는 은퇴 직전 1000개의 3점슛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한 후, 자신이 갖고 있는 공격과 관련한 기록은 곧 변연하가 모두 갈아치우지 않겠냐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럼 난 어시스트를 하면 안 되는 건가?”
이번에는 변연하가 묻는다. 사실 선수 ‘변연하’를 떠올릴 때 폭발적인 득점과 해결사로서의 이미지, 그리고 ‘백스텝 3점슛’을 먼저 떠올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만 스무 살 나이에 정규리그 MVP를 수상(2001년 겨울리그) 했던 변연하의 트레이드마크는 타고난 득점력이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본인도 인정한다.
“그래. 그런데 난 정말 어렸을 때도 코트에서 싸가지가 없었던 거 같아.”
혹독한 자아비판이다.
“삼성에 있을 때, 그렇게 팀 멤버가 좋았는데도 ‘왜 나한테 패스 안 해’, ‘왜 스크린 안 걸어줘’ 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 자신 있었거든. 주면 내가 다 넣을 거 같았고, 그러면 다 이길 수 있을 거 같았으니까... 솔직히 티도 많이 났을 텐데, 언니들이 많이 참아줬지.”
어찌 보면 ‘싸가지가 없다’라는 말보다는 ‘지독한 자신감’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득점에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변연하는 2000년 여름리그 이후 지금까지 단 한 시즌도 평균득점이 한 자리대로 내려간 적이 없다.
“그래서였나? 그때는 은퇴하고 지도자를 하는 언니들도 이해가 안됐어. 평생 농구를 하고 또 하고 싶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좀 달라졌어. 나랑 친한 사람들은 알 거야. 경기할 때 내 표정을 보면 내가 3점 넣거나, 중요한 걸 직접 성공시켰을 때보다, 내 패스를 우리 애들이 넣어줬을 때 표정이 더 밝다는 걸... 그래서 나도 지금은 ‘아... 이래서 언니들이 은퇴하고 지도자를 한 건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해.”
3Q. 변연하가 특별한 이유
WKBL 선수들의 휴가가 끝나갈 무렵 대표선수들은 소속팀이 아닌 대표팀에 소집됐다. 이 때 변연하는 허리 디스크가 심해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대표팀 취재를 가기 전, 괜찮냐고 물어봤더니 환자라서 잘 먹어야 한다며 망고와 체리를 사오라고 협박을 한다. 변연하는 그런 선수다.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를 회상할 때, 많은 KB스타즈의 팬들은 1차전을 아쉬워했지만 변연하는 1차전 보다 2차전을 더 많이 언급했다. 2차전에서 신한은행은 테크니컬 파울을 연달아 받는 등 위기를 자초했고, 여러 가지 상황이 KB스타즈에게 유리하게 흘렀다. 게다가 KB스타즈의 홈이었던 청주 경기였다. 그러나 KB스타즈는 자유투를 숱하게 놓치며 스스로 기회를 놓쳤고, 후반에 폭발한 신한은행 스트릭렌의 폭발력에 무너지고 말았다. 변연하는 “떠먹여주는 경기도 이기지 못했다는 게 속상하다”고 분한 맘을 감추지 못했고, 시즌 내내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이날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커리에 대해서도 “커리 그 X, 조금만 더 해주지” 라며 특히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미 이날 변연하의 허리 상태는 최악이었다. 경기 전 몸을 풀다가 허리에 통증을 느꼈던 변연하는 경기 내내 정상이 아니었다. 결국 시즌을 모두 마친 후 병원 진단을 받은 결과, 수술까지 감안해야 하는 치료가 시급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서동철 감독 역시 “2차전에서 신한은행을 이겼어도 연하는 3차전에 나설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커리가 알고 보니 착한 계집애야. 나 힘들지 말라고 2차전에서 끝냈나봐.” 베테랑은 털어내는 것도 빠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커리에 대해 가장 ‘꽁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변연하는 커리 덕분에 더 무리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며 웃었다. 하지만 2차전에서 이겼다면 병원에서 무슨 말이 나왔다 해도 3차전 경기에 나섰을 것이라고 말한다. “경기 중에  앰뷸런스 타고 병원에 가고 싶은거냐”고 물었다.
“재밌겠네. 선수하면서 못해본 거 없이 다해봤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못해봤네. 그래도 뛰어야지. 그럼 그걸 안 뛰냐?”
이번 아시안게임 대표에 처음 소집됐을 당시 변연하는 고민이 많았다. 대표팀 훈련을 소화할 수 없다면, 아시안게임도 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당장 재활이 필요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아시안게임에 대한 미련도 분명히 있었다. 선수생활동안 단 한 번도 차지해보지 못한 아시안게임 금메달이었고, 스스로도 마지막 국가대표라는 생각에 간절함이 있었다. 지난 2007년 인천에서 열렸던 ‘제22회 FIBA 아시아 여자농구선수권대회’가 변연하가 국가대표로서 우승을 차지한 유일한 대회다. 
변연하의 몸 상태는 대표팀을 이끄는 위성우 감독에게도 부담이었다. 그러나 변연하가 자신의 상태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이었던 것과 달리 위 감독은 단호했다. 변연하의 엔트리 제외는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
“최대한 연하 상태를 봐 가면서 배려를 해서 몸을 만들 수 있도록 해 줄 생각이고, 연하도 어린 선수가 아니고 베테랑이기 때문에 충분히 아시안게임에 맞춰서 만들 거라고 확신합니다.”
위성우 감독이 변연하에 대해 배려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변연하를 평가하는 위 감독의 시선이 농구팬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위 감독은 변연하에 대해 “클러치 타임에서 가장 확실한 선수”라고 단언한다. 위 감독은 이전에도 변연하에 대해 ‘모든 선수들이 배워야 할 에이스의 표본’이라고 말한 바 있다.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집에 농구 게임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스포츠에 미치지만 않았어도 가세를 일으켜 세웠을 것’이라고 아직도 어머니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나 역시도 이름만 대면 마니아들은 누구나 알 법한 농구 게임이 컴퓨터에 깔려있다. 내 인생에 크게 도움을 주지 않았던 손대범 편집장이 살면서 내게 해준 몇 안 되는 착한 일 중 하나가 이 게임 타이틀을 준 일이다. 
이 게임에서 최고의 스타는 르브론 제임스도, 케빈 듀란트도 아니다. 올란도 매직의 17번을 달고 있는 포인트 가드, 박진호, 그래, 나다. 내가 만들어 놓은 키 6피트 10인치의 포인트가드, 모든 능력치 99의 최고 선수다. 이미 윌트 채임벌린의 한 경기 최다득점도 갈아 치웠고, 트리플 더블 따위는 평균스탯이라고 봐야 하는 선수다. ‘매직의 배신자’ 드와이트 하워드의 머리 위로 덩크도 꽂아 넣는 선수다. 가끔 “그러고 놀면 재밌냐”고 한심해 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굳이, 게임하면서 스트레스 받을 필요 있냐고... 적어도 게임에서는 내가 왕이고 싶다.
그런데 종종 WKBL 경기를 보면, 그런 게임 속 캐릭터보다 변연하가 더 잘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모든 능력치를 99로 맞춰놔도 ‘빌어먹을’ 랜덤 수치 때문에 일정 확률로 불발되는 공격이 있는 반면, 어느 때의 변연하는 정말 ‘환장할 것’ 같은 플레이를 보여준다. 2012-13시즌 플레이오프 맞대결을 앞두고 현역 마지막 시즌이었던 박정은 코치는 “연하 특유의 리듬이 있는데, 만약 경기 초반에 연하가 그 리듬을 타기 시작하면 그 때는 무슨 짓을 해도 못 막는다”고 했다. 젊은 선수들 중 변연하와 가장 많은 매치업 경험을 갖고 있는 신한은행의 김단비는 변연하에 대해 “경기 내내 잘 막았다 싶었을 때도 끝나고 보면 결국 언니 할 거는 다 했더라”며, “수비하는 선수를 미치게 만드는 선수”라고 말하기도 했다. 클러치 슈터답게 팀을 승리로 이끄는 위닝샷도 가장 많이 터뜨린 선수기도 하다. 그러나 변연하는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 1차전처럼 자신이 마지막 공격을 실패해서 놓친 경기도 이긴 경기 못지않게 많다고 말한다.
“누구나 부담되고, 실패하면 욕먹고 미안하고 그런 건 누구나 다 똑같거든. 평소처럼 정상적으로 할 수 있으면 그냥 하면 돼. 그런데 긴박한 상황이 되면 아무래도 그게 잘 안되잖아. 그래서 ‘에이, 그냥 내가 하자’ 그런 거지. 내가 제일 언니니까... 나이도 제일 많고... 경험도 많고... 안되면 뭐, 욕은 내가 먹으면 되지. 실패하면 애들한테 미안하다고 하고... 우리 애들이 설마 나한테 뭐라고 하겠어?”
위성우 감독이 높게 평가하는 것은 변연하의 이러한 마인드다.
“그게 에이스에요! 능력이 좋은 선수들은 많은데, 이런 선수들도 ‘안됐을 때는 어떡하지’에서 꼭 한 번씩 걸리거든요. 그런데 연하는 ‘그러니까 내가 할께’라고 하잖아요. 그게 별거 아닌 거 같지만 정말 힘든거고, 그래서 연하가 진짜 에이스인거라고 생각해요. 기량도 출중하죠. 그런데 그런 마인드까지 갖고 있으니 더 무서운거죠!”
그래서 위성우 감독이 꾸리고 있는 대표팀에서도 변연하는 대체불가의 절대자원이다. 또한, 위 감독 역시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배려하며 무조건 아시안게임에 데려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작년 ABC때도 허리가 안 좋았는데 위 감독님이 배려를 많이 해줬어. 할 때 ‘빡쎄게’ 하고 집에 가서 며칠 쉬지 뭐. 아시안게임 우승해야지. 나도 마지막 대표팀인데... 중국이랑 일본도 1진 안 온다며? 얘들이 예의는 있어서 나랑 미선 언니 마지막이라고 배려해주는 데 받아먹어야지.”
4Q. ‘No.10 변연하’ = 절대적인 신뢰 
“글쎄... 우승을 하고 은퇴를 할 수 있을까?”
자, 이번에는 팀 이야기다. KB스타즈 팬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다. 변연하의 입에도 우승에 대한 확신이 사라졌다.
“글쎄... 작년만큼은 하고 싶은데, 내가 그만큼 할 수 있을까?”
계속 듣자하니, 무언가에 대한 불만이나 자신감의 상실이 아니다. 목표에 대한 간절함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거나 밝히지 않아도 되는 연륜이다. “변연하답게 말해보라”고 하자 이게 ‘변연하다운 것’이라고 한다. “내 나이가 몇 갠데!‘라고 반박한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구체적으로  목표를 세웠지만 이제는 지난해 한 것 만큼만 하자고, 내가 해온 것을 지키기만 해도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독여야 하는 나이가 됐음을 느끼고 있다. 사실, 여느 선수들이 훨씬 이전에 느껴야 했던 서글픔을 ‘이제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변연하 역시 이를 알고는 있지만 머리로는 받아들이면서도 안타까운 심정은 어쩔 수가 없나보다. 하지만 스스로 ‘싸가지’라고 정의한 ‘못된 성격’이 빗어낸 승부 근성은 골골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꾸역꾸역 몸을 만들고 시즌 준비를 해야 하는 본능으로 자신을 이끌고 있다.
변연하는 팀 안팎에서 절대적인 신뢰의 대상이다. 대표팀에서 위성우 감독이 보여주는 신뢰 이상으로 KB스타즈에서는 서동철 감독이 변연하에게 신뢰를 나타내고 있다. 서 감독은 “팀에서 특정 선수에게 감독이 너무 편애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지론을 강조하면서도 지난 시즌 WKBL 시상식에서 변연하가 무관에 그치자 허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항상 젠틀한 이미지를 유지했던 서 감독은 “기자분들께 솔직히 서운하다”고 말하기도 했고, 팀 플레이를 강조한 자신의 색깔에 맞추느라 변연하가 손해를 봤다며 “내 잘못이다”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즌 막판 WKBL 선수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를 보면, 변연하는 MVP 투표에서 박혜진에 이어 2위를 차지했고, 베스트 5에도 선정됐다. 지난 시즌 1-2위를 차지한 우리은행과 신한은행 선수들은 가장 위협적인 선수로 여전히 변연하를 꼽았고, 변연하는 각 구단 선수들이 자신들과 상대해서 ‘가장 위협적이었던 선수’를 꼽은 설문에서 유일하게 전 구단을 상대로 3위안에 이름을 올렸다. 구단과 코칭스태프가 가장 영입하고 싶은 선수에서도 단독 1위였고, 이미선과 함께 타구단 선수들이 함께 뛰고 싶은 선수로 가장 많이 뽑은 것도 변연하였다.
타구단 스태프는 변연하에 대해 ‘팀의 구심점과 리더 역할’, ‘득점력’, ‘여전한 정점의 기량’, ‘최고의 선수임에도 꾸준히 열심히 하는 성실성’ 등에 높은 평가를 내렸다. 선수들 역시 “패스가 아무리 좋지 않아도, 모두 득점으로 연결해 줄 것 같다”, “모든 포지션이 다 되는 선수”, “다양한 공격 기술이 대단하다”라며 함께 뛰어보고 싶은 이유를 들었다. 심지어 “플레이가 너무  완벽하다”는 평가와 더불어 “그냥 신(神)이다”라는 답변도 있었다.
팀 내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시즌 변연하의 불화설이 불거졌을 당시 KB스타즈의 주장이었던 정미란은 “우리 언니 그런 선수 아닌 거 아시잖아요”라며 답답해했다. 지난 시즌 KB스타즈 주전 중 막내였던 홍아란은 “연하 언니가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것만큼 성장해야하는 데, 거기에 미치지 못할까봐 걱정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모니크 커리는 변연하의 별명이 변코비라는 것에 대해 “WKBL에서 변연하만큼 농구하는 선수를 보지 못했다. 그렇게 불릴 자격이 충분한 선수”라고 평가했다.
변연하가 이러한 신뢰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실력은 물론 철저한 자기관리와 30대 중반을 넘어서는 지금도 훈련에서 가장 성실한 모습을 보이는 선수라는 점 때문이다. 변연하와 오랫동안 함께 했던 농구인들은 변연하에 대해 “잘 한다”는 점과 함께 “정말 열심히 한다”는 것을 같이 언급한다. 변연하를 최고로 끌어올리고, 동료들의 신뢰와 그 이상의 존경까지 이끌어 낸 가장 큰 원동력이 바로 그 부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변연하는 뒷방 늙은이 마냥 자신은 팀 왕따라며, “애들이 놀아주지도 않는다”고 툴툴거리다가도 조금만 띄워주면 바로 제자리를 찾는다. 단순해서가 아니다. 본인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나 변연하야.”
살면서, 스스로 “나 누구다”라고 외칠 수 있는 ‘교만’과 ‘건방짐’에 가까운 ‘당당함’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것은 때로는 즐거울 수도, 혹은 불쾌할 수도 있는 경험이다. 그러나 코트에 들어서는 것만으로 의미를 줄 수 있는, ‘선수 그 이상의 선수’인 변연하는 적어도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 그런 선수가 ‘겸손’을 이유로 필요 이상의 꼬리를 마는 모습은 오히려 어색하고 안타깝다. 변연하는 어느 정도는 건방지고 도도해야 한다. 꼿꼿해야 한다. 그리고 별로 기다리고 싶지는 않지만, 결국은 오게 될 그녀의 은퇴식 때도 그렇게 “나, 변연하”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웃어주길 기대한다. 그러한 도도함이 바로 팬들을 열광시켰던 슈퍼스타 변연하의 가치를 만들었던 자존심의 밑바탕이었으니까...
(점프볼 201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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