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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이 가벼운 책임자들의 무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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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발전소와 관련한 내부 문건이 외부로 유출되며 곤욕을 치르고 있는 한국수력원자력이 일련의 사고에도 불구하고 책임소재와 이에 대한 규명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출범이후 박근혜 정부가 보여준 행보와 똑같은 모습이다.

지난 28,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한수원 본사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한 조석 한수원 사장은 이번 사태로 국민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사과에 나섰지만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을 져야 하지만 지금 책임은 상황을 수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사태가 해결된 후에도 책임질 의향이 있냐는 질문에도 지나친 확대해석에 동의할 수 없다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국가 1급 보안시설인 한수원의 내부 자료가 대거 유출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음에도 당당하게 확대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배짱만은 분명 한수원을 이끄는 사장다운 모습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지난 2년간 나타난 무책임한 지도층의 표본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조 사장은 사이버 공격 시도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으며 이러한 공격은 지금도 진행 중이라고 밝히며 방어적 조치를 취하고 있어 원전 운영에는 전혀 영향이 없다고 강조했다. 원전은 안전하지만 계속 위협을 받고 있으니 현재 책임론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이 계속 자리를 보전해야 한다는 우회적인 논리다.
 
국민은 이러한 조 사장의 논리를 이미 올 초에 똑같이 겪어본 바 있다.
 
카드정보유출 대란이 발생했을 당시 현오석 전 경제부총리와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재발방지를 다짐하면서도 책임과 관련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심지어 정보유출 사건 이후에 임명된 각 카드사의 수장들에 대해서는 일벌백계를 강조했으면서도 자신들에 대한 책임 추궁에 대해서는 뻔뻔함으로 일관했다.
 
책임을 지는 것보다 사태를 수습하는 게 먼저라는 말은 조 사장보다 당시 금융권 고위 관계자들이 먼저 썼던 말이다.
 
한 연예인이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불멸의 명언을 만든 후, 올해 사회 지도층에서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정치개입은 했지만 대선개입은 하지 않았다”고 재창조에 나섰고, 연말 사회를 발칵 뒤집었던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 또한 내리라고는 했지만 회항을 지시하지 않았다명언 오마주에 동참했다.
 
사실 이러한 릴레이는 올 한해 동안 계속됐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과 관련해서는 공문서는 위조됐지만 증거조작은 아니다라는 말이 나왔고, ‘세월호 참사보도와 관련해서는 협조 요청을 했지만 언론통제는 아니다라고 당당하게 발언했다. 나열해보자면 이 외에도 참 많다.
 
한 번 나온 명언에 대한 지도층의 드높은 충성도는 이토록 압도적이었고, 응용 또한 뜨거운 열기를 자랑했다. 조 사장 역시 금융권 책임자들의 명언을 그대로 사용하며 국민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대한민국 교수님들의 평가대로 우리 사회의 1년 트렌드였던 지록위마(指鹿爲馬)’에 그대로 발을 맞췄다.
 
사고에 대한 칼 같은 선 긋기와 책임회피에 나서는 모습은 이번 정부 들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전문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른 바 높은 자리로 대거 입성했던 관료 출신들이 임기 초기부터 각종 사고에 대처하는 무능함을 드러낸 후 특유의 보신주의로 연명한 것이 사회적으로 확대되는 분위기다.
 
거론하는 것조차 지겨워진 정부의 인사 난맥과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책임 규명, 역대 최악의 공약 이행률에 대한 책임 있는 조치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저 위기 해결을 위한 환기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는 사태 속에서도 어처구니없는 공과론을 내세워 연명하는 태도가 꾸준히 이어졌다.
 
심지어 청와대 문건 유출과 관련해서는 대통령이 직접 수사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는 지적과 함께 대다수의 예상과 다름없는 방향으로 수사가 진행되며 정치권과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극대화시켰다.
 
딱히 할 말이 없을 때는 대안이 없고 적임자가 없다는 것 마저 연명의 이유가 됐다. 인사 문제에서 부적격 인물이 거부당하면 그보다 더한 인물이나 비상식적인 조치가 이어지며 반대 여론에 대한 보복인사와 다를 바 없는 화풀이 임명의 모습도 보였다.
 
한수원 사태도 이러한 고위층의 분위기와 흐름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조 사장은 한수원이 그동안 강도 높은 공공기관 정상화와 울진 대타협 등을 이루었는데 비열한 범죄자의 공격 시도에 이 같은 성과가 부정되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수원에 대한 걱정인지 반성의 자리에서 자신의 공로를 스스로 치하한 셀프 위로인지 모르겠다.
 
밀양 송전탑 건설과 연계되어 공사 중단 요구와 잦은 구설에 휘말렸던 신고리 원전 3호기에서 지난 25일 가스가 유출돼 작업 중이던 인부 3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러나 모든 관심이 해킹에 집중되어 이 문제가 오히려 부각되지 않는 느낌이다. 조 사장은 한수원의 공로가 묻히고 있다며 해커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커다란 사고를 생각보다 조용히 넘어가게 해준 것에 감사해야 할 입장일지도 모른다.
 
대통령 해외 순방을 수행하던 중 성추문에 휩싸였던 윤창중 전 대변인인 대국민 사과를 하는 자리에서 국민에 대한 사과는 뒷전이었고 오직 대통령에게 잘못했다는 말만 반복했다. 뒤이어 이어진 각종 사고에서도 책임 논란이 된 이들은 공식적인 발언에서 국민보다 임명권자에게 더 공개사과를 하는 태도를 유지했다. 이번 조 사장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일련의 사태와 관련하여 책임자들이 중심에 국민을 담지 않고 영혼 없는 발언만 일삼고 있는 대한민국의 2014년은 많은 국민에게 간절히 지워버리고 싶은 상처뿐인 1년으로 기억될 지 모르겠다. 
 

그래, 차라리 얼른 지나가버려라. 2015년이 밝으면 새해에는 달라지겠지”라는 덧없는 기대로 또 한번 희망차게 속아보자!

2014년 12월 29일 <토요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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