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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축구 500경기 출장 김기동 "나는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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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에서 거친 숨을 내쉬는 선수들은 각자의 역할에 맡은 바 활약을 펼치며 자신의 존재를 입증한다. 화려하고 파괴력 넘치는 돌파, 창의력 넘치는 패스, 결정적인 득점력, 놀라운 선방, 거친 몸싸움을 불사하는 강력한 수비 등은 선수들이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는 특화된 능력이고, 이러한 것들이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며 팀의 승리를 이끌어낸다. 그런데 여기, 그러한 것과 관계 없이 의미가 되는 선수가 있다.

 

포항 스틸러스의 미드필더 김기동. 그가 바로 그런 선수다. 김기동은 그저 그라운드에 서 있는 것 만으로, 속된 말로 '숨만 쉬고 있어도' 의미가 되는 선수다.

지난 10월 22일, 현대오일뱅크 K-리그 2011 29라운드 포항과 전남의 경기에서 후반 37분 한 선수가 교체로 그라운드에 투입됐다. 백넘버 6번의 김기동.

 

1972년 1월 12일 생으로 정확히 40세인 필드 플레이어가 프로 500 경기에 출장하는 순간이었다. 이미 경남의 플레잉 코치인 김병지가 500경기를 넘어서 600경기 출장에 다가서고 있지만, 골키퍼인 김병지와는 달리 필드 플레이어가 500경기에 출장하는 것은 프로축구 역사 최초의 기록이었다.

 

"91년에 프로 선수가 된 후 어려운 시간을 이겨내고 오랜 기간동안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어떤 목표를 세우고 이루어 낸 기록이라 특히나 의미가 깊다."

김기동은 자신의 500경기 출장의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부족했기에 가능했던 500경기의 대장정

 

170cm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신장. 뛰어난 피지컬을 갖추고 있는 선수는 아니다. 그렇다고 엄청난 스피드로 상대 진영을 헤짚는 다이나믹함이 있지도 않다. 어떤 상황에서도 골을 터뜨리는 천부적인 골잡이도 아니다. 과연 그런 김기동이 긴 시간 그라운드의 터줏대감으로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부족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장점이 없는 선수다. 체격조건이 좋지도 않고, 발이 빠른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메시처럼 뛰어난 드리블을 갖고 있지도 않다. 타고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특출함이 없다는 게 장점이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있었다면 스스로 자만해서 500 경기까지 뛸 수 없었을 것 같다. 나는 항상 부족하고 모자랐기에 늘 그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을 통해 부족한 점을 충분히 채워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런 과정을 통해서 노력하고 연구하고 훈련한 부분들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힘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정말 축구 선수로서 다른 선수들 보다 나은 면이 전혀 없었던 것일까?

 

"그래도 전술적인 이해도는 다른 선수들보다 빠른 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경기장에서의 판단도 한 박자 빠르게 가져갈 수 있었고, 부족한 다른 것들을 보완할 수 있는 조건이었던 것 같다."

 

 

쉽지 않았던 프로에서의 시작

 

김기동은 충청남도 당진에 위치한 신평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프로에 뛰어들었다. 지금이야 종목을 막론하고 고졸스타가 많이 배출되고 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운동선수는 당연히 고교 졸업 후 대학을 가야 하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던 때였다. 과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프로에 뛰어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89년이었나? 우리 위에 선배중에 문식이형(최문식, 전남드래곤즈 스카우터)이 동대부고를 졸업하고 바로 프로에 들어갔는데 적응을 너무 잘했다. 워낙 발재간이 좋아서였기도 했지만, 최문식이라는 선수가 프로에서 바로 활약을 펼치자 고졸 선수들에 대해서도 프로 구단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대학이라는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프로로 진출하는 문이 열렸다. 노태경, 장영훈, 장형석 등이 나와 함께 프로에 들어왔던 동기들이다."

 

대학에서의 활약을 볼 것도 없이 프로에서 지명한 선수였지만 김기동의 프로 초년생 과정은 그다지 순탄치 않았다. 1991년 포항에 입단했지만 포항을 떠나기까지 2년 5개월동안 그는 1군 무대의 그라운드를 단 한 차례도 밟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팀의 규모 축소와 함께 유공 (현재 제주 유나이티드) 으로 팀을 옮기게 된다.

 

"그때 팀을 옮긴 게 이적 형태로 진행된 게 아니었다. 전반기 마치고 후반기 선수 등록 기간 전에 유공에 가서 연습경기를 뛰고 평가를 받아서 계약을 하는 거였다. 쉽게 말해 방출 후 테스트를 받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연습 경기에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축구화를 벗어야 했다. 연습경기 두 경기를 뛰었는데, 거기서 나도 그만 부상을 당했다. 내측 인대 부상으로 한 달을 쉬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실상 힘들겠구나 싶었는데 그래도 뭔가 보여준 게 있었는지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때 유공의 박성화 감독님이 계약하자고 하지 않았다면 나는 갈 데도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어가게 된 유공에서의 프로 생활. 그리고 2년 반 이상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1군 무대에 처음으로 발을 딛게 되었다.

 

“1993년 9월 18일 동대문운동장에서 LG와의 경기 때 기선이형(김기선) 이랑 교체해서 후반에 들어갔던 게 첫 데뷔였다. 그 경기는 아무런 기억이 안 난다. 너무 긴장을 많이 한 탓에 들어가서 아무 생각 없이 뛰었던 것 같다. 그리고 후기에서 8경기를 뛰었다. 그렇게 94년까지 쭉 로테이션 맴버로 게임에 나섰다.”

 

니폼니쉬의 K-리그 미드필드 혁명, ‘니포축구’의 중심이 되다

 

3백 중심의 강력한 파워와 선 굵은 축구를 지향하던 국내리그에서 1995년 유공에 부임한 니폼니쉬의 새로운 축구는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3-5-2가 축구의 기본이었던 우리나라에서 4-4-2의 4백 전술과 정교하고 세밀한 패스 플레이, 미드필더 중심의 아기자기한 플레이를 통해 ‘니포축구’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한국 축구판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왔다. 그리고 그 중심에 김기동도 있었다.

 

“니폼니쉬 감독 부임 첫 해는 과도기였다. 완전히 바뀐 스타일에 적응이 필요했다. 맨투맨의 수비방식이 없어지고 지역방어가 적용된 것이다. 스토퍼를 아예 없애버리고 수비형 미드필더라는 새로운 자리가 생겼는데 그게 바로 내 자리였다. 당시 내노라하는 공격수였던 황선홍(현 포항스틸러스 감독), 김도훈(현 성남일화 코치), 최용수(현 FC서울 감독대행) 등을 내가 체크해야 했다. 대단한 선수들을 상대로 맞서는 게 쉽지 않았지만, 그 선수들 역시 반대로 역습 때 나부터 시작되는 공격의 흐름을 끊기 위해 수비를 해야 했으므로 마찬가지로 힘들어했다.”

 

과도기를 거친 니폼니쉬의 축구는 당시 유공의 ‘황금 미드필더 라인’으로 불린 윤정환-윤정춘-김기동-윤정춘-김기남-조셉 등이 등장하며 완성도 높은 축구, 재미있는 축구를 K-리그에서 펼쳐냈다.

 

돌아온 포항에서도 최강의 중원을 만들다

 

김기동은 2003년 친정이었던 포항으로 돌아왔다. 이전까지 좋은 공격수를 보유하고도 제대로 된 패스플레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평가를 들었던 포항은 김기동의 가세 이후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이후 사령탑에 오른 세르지오 파리아스 감독은 ‘파리아스 매직’으로 불린 포항의 돌풍을 일으켰고, 그 중심에는 김기동, 따바레즈, 황지수, 황진성 등의 미드필더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FA가 된 후 많은 생각이 있었지만, 당시 포항의 감독이었던 최순호 감독이 2년 동안 적극적으로 영입의사를 보여줬었다. 프로 초년생 시절 플레잉 코치 형식으로 함께 운동하고 가르쳐줬던 최순호 감독의 적극성과 친정팀이라는 부분 등이 이유가 돼서 포항을 선택하게 되었다.”

 

황선홍-홍명보-라데로 일컬어지던 포항의 빅 3시대 이후, ‘축구 명문 포항’ 이라는 자존심이 가장 빛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2006년 통합 3위를 차지한 이후 포항은 2007년 K-리그를 제패했고, 2008년에는 FA컵을, 그리고 2009년에는 피스컵을 차지하고 AFC챔피언스리그에서도 우승컵을 안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때가 두 번 있었던 것 같다. 젊었을 때는 98년, 99년 무렵이 가장 좋았다. 몸 상태가 너무 좋았고, 축구하는 게 너무 신나고 좋았었다. 어린 아이들이 소풍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운동 시간을 기다렸었다. 그 후에는 포항에서 뛰었던 2007년 이후가 참 좋았다. 남들은 은퇴할 나이라고 했던 그 시기에 나는 스스로도 내 상태가 너무 좋다고 느낄 만큼 전성기를 누렸던 거 같다.”

 

대표팀에 대한 아쉬움 “뛰어봤으니 괜찮아...”

 

프로 500경기를 넘긴 베테랑이지만 그의 국가대표 경력은 단 3경기에 그치고 있다. 그래서 축구팬이 아닌 일반인들은 화려한 그의 경력에도 불구하고 ‘김기동’이라는 이름이 낯설기만 하다.

“97년 9월에 발탁이 되었는데 갑작스런 발탁인 탓에 제대로 준비를 하지도 못했다. 대표팀 선수들과 발을 맞춰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게임만 뛴 것이다. 게다가 교체 맴버로만 준비하다가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월드컵 예선 한일전에 선발로 나섰다. 우리는 이미 본선행을 확정지은 상황이어서 절실함이 덜했고, 반면 일본은 ‘한일 동반 진출’등을 말하며 상당히 승리가 절박할 때였다.”

 

결국 경기는 0-2로 패했고, 안방에서 일본에게 완패를 당한 탓에 책임소재가 불거졌다. 김기동은 이러한 흐름에 희생당하듯 대표팀에서 제외됐고, 다시는 국가대표로 뛰지 못했다.

 

“좀 더 준비를 하고 나섰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너무 급격하게 선발이 되었다고 충분히 보여주지도 못하고 결국 물러나야 했으니 아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결국 지나간 일이다. 대표팀을 한 게임도 못 뛰어 본 선수들도 있는데, 그래도 대표로 뛰어봤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한다.”

 

내 아들에게 아버지의 축구하는 모습을 기억하게 하고 싶었다

 

노장의 나이에도 그라운드를 누비는 김기동을 지금도 계속 달리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처음 이 질문에 ‘먹고 살기 위해서...’라고 대답을 했던 김기동은 자신을 그라운드에 머물게 한 이유로 주저없이 이렇게 말했다.

 

“포항으로 팀을 옮겼을 때 아들이 태어났다. 그때부터 ‘이 아이가 몇 살이면 나의 축구하는 모습을 기억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아들한테 아버지가 축구하는 모습을 기억하게 해주고 싶었다. 아마 다른 선수들도 다들 똑같은 마음일 거다. 다행히 그 목표를 이룬거 같다. 이제는 내 아들이 아버지의 축구선수로서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제 500경기를 넘어서 501경기를 뛴 김기동. 그렇다면 이제 남아있는 목표는 무엇일까?

 

“일단 목표로 잡았던 500경기를 달성했다. 통산 40-40 (40득점 40어시스트)에 1골만을 남겨두고 있어서 욕심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2군리그도 없어지고, 선수단 규모도 35명으로 축소해야하는 상황에서 내 욕심만 부릴 수는 없다. 팀과 감독의 입장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축구선수로서 황혼을 넘어 은퇴의 시기까지 미뤄버린 김기동이 그라운드를 누비는 모습을 내년부터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아직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시즌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거취를 결정하는 것은 경솔한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주한 상황에서 미리 단정짓지 않고 살아 왔던 것 또한 오랜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바탕이라고 말한다.

 

지금 대표팀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지동원 (91년생), 손흥민 (92년생)이 태어나기도 전에 프로 유니폼을 입었고, 20년을 하루같이 달려 필드플레이어 최초로 프로 500경기 달성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한 김기동. 그는 분명 축구와 자신의 인생에서 이미 일가를 이룬 절정의 마에스트로라는 평가를 받아도 부족함이 없는 존재가 되어있다.

 

K-리그 500경기 출장의 역사를 써내려갈 필드 플레이어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적어도 최초의 이러한 기록을 우리 시대에 볼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지금의 축구팬들은 김기동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한국 축구사에 한 획을 그은 대기록의 사나이 김기동이 앞으로 적어나갈 인생에서의 기록도 축구팬 모두가 축하하고 응원할 것이다.

 

그라운드에 서 있기만 해도 의미가 되는 선수 김기동. 이제 그는 그라운드에 있고 없고를 떠나 그 이름 자체로 전설이 되었다.

 

[축구 선수의 아내] 철인을 만든 사람, 조현경

 

필드 플레이어 최초 500경기 출장의 기록을 세운 김기동 선수의 아내인 조현경씨는 내조에 대해 특별한 게 없다고 말했다. 세간에서 가장 관심을 가질 만한 보양식에 대해서도 ‘좋은 음식은 구단에서 훌륭한 영양사가 최고의 식단으로 준비해준다.’고 대답했을 뿐이다.

 

“항상 집이 최고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려고 노력했어요.”

 

그녀가 말하는 내조는 간단 명료했다. 스물 네 살 나이에 결혼을 했지만 축구 선수 남편의 일과는 그녀의 상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김기동은 1년 내내 밤 10시, 늦어도 11시에는 반드시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그런 규칙적인 생활을 선수 생활 내내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구단 회식 등 정말 특별한 날을 제외하면 20여년을 계속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생활 리듬이 너무 달라서 남편이 잠든 후에 일어나서 TV를 보기도 했는데 어느 날은 밤에 창 밖의 네온 싸인을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구요. 특별히 남편한테 화가 나거나 불만이 있는 게 아닌데,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또래와 완전히 다른 생활을 하는 게 그때는 조금 서러웠나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김기동이 집에서 정말 편하게 쉴 수 있게 해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각지의 원정을 다니며 숙소생활을 해야 하는 남편이 지루하지 않도록, 집에 다른 숙소나 호텔보다 더 안락하고 편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인테리어에도 신경을 썼고, 무엇보다도 모든 일에서 남편이 항상 우선이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자라고, 학교를 가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항상 남편이 우선이었고 지금도 그래요. 어려서부터 우리 아이들은 아빠가 방에서 쉬고 있다고 하면 그 방에 들어가지도 않고 칭얼대지도 않았어요. 남편의 휴식이 제일 중요했으니까요.”

 

실제로 김기동은 집에서 전등 하나 갈아본 일 없고, 못 한 번 박아 본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러기 전에 이미 아내가 다 해결했기 때문이란다. 게다가 축구 열기가 뜨거운 도시, 포항인 만큼 축구 선수와 선수 가족은 준 연예인처럼 주변의 관심을 받게 되므로 작은 행동 하나에도 차분하고 섬세한 주의가 필요했다고 한다.

 

“내가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뜻하지 않은 소문이 될 수 있으니까 어쩔 수 없죠.”

 

그녀는 축구선수의 아내나 여자친구가 축구와 축구선수의 생활에 대해 빨리 이해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했다. 본인도 그 부분이 부족해서 처음에 조금 힘들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축구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남편을 만났어요. 처음에는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을 보면 조금 웃겼어요. 건장한 남자들이 조그마한 공 하나를 몰고 우르르 뛰어 다니는 게 그냥 재밌었다고나 할까? 그러다가 조금 지나서는 내 남편이 자랑스러웠죠. 경기장에서 뛰면서 이 많은 관중들을 열광시키는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내 남편이었으니까요. 지금요? 글쎄.. 지금은 조금 안스러워요. 존경스럽기도 하구요. 남들은 이미 은퇴를 했을 나이인데도 경기장에서 그렇게 뛰는 걸 보면요...”

 

운동선수가 성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 꼽히는 것이 결혼이다. 안정적인 가정은 선수가 자리를 잡고 성장해가는 데 가장 큰 버팀목이 되어주며 책임감까지 투철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철인(鐵人) 김기동은 지금도 이상형을 물으면 아내인 조현경씨를 주저없이 꼽는다. 재미를 위해 다른 연예인을 물어도 대답은 변하지 않는다. 인터뷰 내내 김기동의 입에서 아내의 이름은 특별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가 써내려간 전설의 절반이 아내인 조현경씨의 공이라는 사실은 굳이 끄집어낼 필요도 없는 사실일 것이다. 김기동의 500경기 출장은 선수 김기동과 아내 조현경이 함께 완성한 빛나는 성과이니 말이다.

 

 

 

이코노미컬처 / 2012.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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