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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BL] '릅한별', '별브론'으로 기억되는 김한별의 '별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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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속 구단인 BNK와의 계약에서 합의를 이루지 못한 김한별이 선수 커리어를 마감하는 것 같다.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1986년 태어난 혼혈 선수인 그는 WKBL에 동포 선수 자격으로 입성했다. 킴벌리 로버슨(Kimberley Roberson)이라는 이름으로 2009년 삼성생명에 입단해 WKBL에서 총 14시즌을 뛰었다. 

 

승부욕이 지나쳐, 때로는 거친 경기 매너와 잦은 항의 등으로 좋지 못한 평가도 있었고, 다른 문화권에서 성장한 탓에 한국 문화에 대한 적응은 물론, '관리가 쉽지 않은 선수'라는 꼬리표도 달았다. 하지만 WKBL 출범 후 현재까지 역대 최고의 동포 선수이며, 고질적인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플레이오프만 나가면 '크랙' 그 자체의 위력을 보여줬던 선수다. 

 

데뷔 후 14시즌 동안 정규리그 372경기 평균 25분 10초를 뛰며 9.6점 6.1리바운드 2.9어시스트 1.3스틸을 기록했다. 기록만 놓고 보면 마냥 높은 평가를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는 항상 기록 이상의 가치를 보여줬다. 특히 큰 경기의 김한별은 에이스 그 자체였다. 그래서 더 인상 깊게 WKBL 역사에 남을 수 있었다. '김한별' 그 자체로 기억됐던 순간들을 되짚어 본다.

 

구분 경기수 평균시간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 2P% 3P%
정규리그 372 25:10 9.6 6.1 2.9 1.3 0.3 48.8 29.0
PO 42 33:38 16.4 6.8 4.2 1.3 0.6 52.3 32.5

 

 

1. 왕조 종결자

 

삼성생명은 WKBL 출범 전, 동방생명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때부터 여자 농구의 명문이었다. WKBL 출범 후에도 그 기세는 이어졌다. 98여름리그를 시작으로 99여름리그, 00겨울리그에서 통합 우승을 차지했다. 01겨울리그에서는 정규리그 우승을 신세계에게 내줬지만, 챔피언결정전에서 한빛은행에게 1차전을 내준 뒤, 내리 3연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했다. 출범 후 6번의 대회에서 챔프전 정상에 4번(통합우승 3회 포함) 올랐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최강의 역사가 끊겼다. 02여름리그, 03여름리그, 04겨울리그는 정규리그에서 정상에 올랐지만 챔프전에서 내리 고배를 마셨다. 현대, 우리은행, 금호생명에게 패했다. 06여름리그에서 정규리그 우승팀 국민은행을 챔프전에서 3승 2패로 누르고 5년 만에 정상에 올랐지만, 이후 신한은행의 독주가 이어졌다. 이변박 트리오(이미선-변연하-박정은)를 구성했지만 우승은 힘겨웠고, 2008년에는 변연하가 팀을 떠났다. 

 

그러한 삼성생명에 새로운 희망이자 구세주로 등장한 것이 김한별이다. 인디애나 대학을 졸업한 김한별은 2009년 동포선수 자격으로 삼성생명에 입단한다.

 

'디펜딩 챔피언' 신한은행과의 데뷔전에서 15분 46초를 뛰며 4점 6리바운드에 그쳤던 김한별은, 두번째 경기였던 우리은행과의 춘천 원정에서 23분 23초 동안 14점 7리바운드 3스틸을 기록했다. 데뷔 시즌 기록은 32경기 평균 26분 15초를 뛰며 11.0점 5.0리바운드. 신인상도 거머쥐었다. 외국인 선수 유무의 차이는 있지만, 역대 신인상 수상자 중 2006년의 김정은(11.8점  4.9리바운드), 2016년의 박지수(10.4점 10.3리바운드)와 더불어 가장 돋보이는 루키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삼성생명이 꿈 꾼 새로운 왕조의 주역이 되지는 못했다. 국내 선수들의 노쇄화와 굳건했던 신한은행의 압도적인 위력 속에 삼성생명이 타이틀을 차지하는 일은 없었다. 김한별 또한 무릎과 허리의 고질적 부상으로 인해 꾸준히 리그를 압도하지는 못했다. WKBL은 12년간 통합 6연패를 이어간 신한은행-우리은행의 왕조가 지배했다. 왕조의 주역이 되지 못한 김한별은 그러나, 왕조를 무너뜨리는 역사에는 중심으로 자리했다.

 

 

 

1-1. 레알 신한은행의 역사를 끊다

 

2012-13시즌. 꼴찌의 반란이 일어났다. 임달식 감독을 보좌하며 '신한 왕조'를 지키던 위성우-전주원 코치가 우리은행으로 이동했다. 이전까지 수년간 평균 승률 1할대에 그치며 만년 꼴찌였던 우리은행이였기에, 이들의 이동이 큰 변화가 되리라고 생각한 이들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은행은 개막전에서 신한은행의 가장 큰 라이벌로 평가받던 KDB생명을 제압했고, 돌풍을 일으켰다. 1라운드를 3승 2패, 공동 2위로 마친 우리은행은 2라운드에 전승을 거두며 신한은행과 공동 선두로 올라섰다. 그리고 이 시즌에 부활한 외국인 선수 제도가 3라운드부터 시행되며 우리은행과 신한은행의 명암이 엇갈렸다.

 

▲ 2012-13시즌 WKBL 외국인 선수 최초 지명
KEB하나은행 우리은행 KDB생명 삼성생명 신한은행 KB스타즈
나키아 샌포드 루스 라일리 비키 바흐 앰버 해리스 타메라 영 리네타 카이저

 

드래프트 제도로 진행된 외국인 선수 지명에서 각 팀이 1명씩을 뽑았는데, 선발 직후 우리은행과 신한은행에 문제가 생겼다. 2순위 우리은행이 지명한 루스 라일리(196cm, C)는 종교 활동 문제로, 신한은행이 5순위로 선택한 타메라 영(188cm, F)은 어깨 부상으로 합류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신한은행은 6명 중 2명에게 문제가 생기는 상황은 정리가 필요하다며 연맹에 대책을 요구하고자 했는데, 이때 우리은행은 발 빠르게 라일리를 포기하고 티나 탐슨(187cm, F)을 선택했다. 우리은행이 드래프트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대체 선수로 전환하자 신한은행도 같은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뽑은 선수가 캐서린 크라예펠드(193cm, F)였다.

 

여기서 양 팀의 명암이 크게 엇갈린다. 37살의 노장이었던 티나는 우리은행에 합류한 후 맹활약을 펼쳤다. 미국 올스타전 출전 등의 문제로 중요한 시기에 팀을 비워 위성우 감독의 속을 까맣게 태웠지만, 이는 이미 합류 전에 약속이 됐던 사항. 티나는 21경기에 평균 36분 55초를 뛰며 21.6점 11.3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에이스가 없다"고 팀 로스터의 약점을 한탄했던 위성우 감독에게 티나는 확실한 에이스 역할을 하며 우리은행의 꼴찌 반란을 이끌었다.

 

반면 신한은행 캐서린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15경기에서 평균 32분 46초를 뛰며 14.9점 8.3리바운드를 기록 중이던 캐서린은 통합 7연패를 노리던 임달식 감독의 승부수였던 3대3 트레이드를 통해 KDB생명으로 이적했고, 이후 KDB생명에서는 10경기에 나서 평균 28분 33초 동안 11.1점 6.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애물단지가 됐다. 외곽슛이 강점이라고 했지만 WKBL에서 경기당 0.96개의 3점슛을 26.7%의 확률로 성공하는 데 그쳤다. 당시 3대3 트레이드는 캐서린-강영숙-이연화와 애슐리 로빈슨(비키 바흐의 대체 선수)-곽주영-조은주를 맞바꾸는 트레이드였다.

 

티나의 가세로 날개를 단 우리은행은 신한은행과의 맞대결에서도 승리를 거두며 기세를 이어갔다. 단독 1위로 올라섰고, 부침을 겪은 신한은행이 좀처럼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티나의 공백 등, 6라운드에 3연패를 당하는 위기도 있었지만 신한은행과의 연전을 모두 승리로 장식한 터라 정규리그 1위 수성에는 문제가 없었다. 신한은행이 7연승으로 마지막 뒷심을 발휘했지만, 양 팀 성적은 24승 11패로 동률. 맞대결에서 4승 3패로 앞선 우리은행이 1위에 올랐다.

 

우리은행과 신한은행의 양강체제가 이어진 가운데 삼성생명은 이 시즌을 16승 19패로 마쳤다. 5할도 안되는 승률이었지만 양강의 기세가 워낙 강했던 탓에 삼성생명은 조용하게 3위에 안착했다. 

 

2012-13시즌은 큰 변화가 있던 시즌이다. 외국인 선수 제도가 부활했고, 정규리그가 8라운드에서 7라운드로 줄었다. 또한 플레이오프 방식도 바뀌었다. 이전까지 1위팀과 4위팀, 2위팀과 3위팀이 5전 3선승제의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이긴 팀끼리 5전 3선승제의 챔프전을 치렀지만, 이 시즌부터 계단식으로 바뀌었다. 3-4위 팀이 3전 2선승제의 준플레이오프를 치르고, 이긴 팀이 2위팀과 3전 2선승제의 플레이오프, 그리고 여기서 이긴 팀이 1위팀과 5전 3선승제의 챔피언결정전을 치르게 됐다.

 

신한은행은 모든 변화가 독주 중인 자신들을 견제하려고 만든 것이라고 반발했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우승을 자신했다. 정규리그 우승을 놓쳤지만 적어도 챔프전에서는 우리은행이 신한은행을 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심지어 현장 관계자와 선수들 조차도 챔프전에서는 신한은행이 우세하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디펜딩 챔피언이자 2위였던 신한은행은 챔프전에 나서지도 못했다. KB를 이기고 올라온 3위 팀 삼성생명에게 플레이오프에서 패했다. 

 

 

 

2012-13시즌은 김한별에게 최악의 시즌이다. 무릎 부상으로 인해 정규리그를 고작 3경기밖에 소화하지 못했다. 시즌 기록은 5.3점 2.3리바운드로 초라했다. 2012년 12월 9일 우리은행과의 경기를 끝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KB와의 플레이오프에도 김한별은 명단에 없었다.

 

삼성생명은 신한은행과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다. 40-50, 10점차 뒤진 채 시작한 4쿼터. 앰버 해리스가 4쿼터에만 14점을 몰아넣었고, 이선화의 득점으로 종료 3분전 역전에 성공했다. 역전이 거듭되던 상황, 종료 18초를 남기고 신한은행은 김단비의 슛이 빗나갔지만 애슐리의 리바운드에 이은 득점으로 다시 리드를 찾아갔다. 65-66.

 

삼성생명의 마지막 옵션은 해리스였다. 해리스가 페인트 존을 공략하며 종료 2초전 역전을 시도했지만, 볼은 림을 돌아나왔다. 그런데, 외곽에서 골밑으로 달려들던 이미선이 이 볼을 팁인으로 올려놓으며 승부가 뒤집혔다. 버저비터였다. 삼성생명이 1차전을 잡았다. 

 

하지만 삼성생명은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이튿날 열린 2차전에서 완패를 당했다. 1쿼터에 단 6점에 묶였고, 2쿼터에는 김연주에게 8점을 내줬다. 해리스가 24점 18리바운드로 분전했지만 해리스 외에 두 자릿 수 득점자가 없었다. 김단비가 18점을 올렸고, 애슐리가 12점 16리바운드로 맞서며 신한은행이 62-47로 대승을 거뒀다. 

 

의외의 일격을 당했지만 신한은행은 다시 정상궤도에 올랐다. 삼성생명은 KB와의 플레이오프 포함 연이은 경기로 체력적인 부담도 컸다. 하루 휴식 후 열리는 3차전은 당연히 신한은행이 가져갈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 때 변수가 등장했다. 김한별이었다. 3차전에 갑자기 선발로 나섰다. 정규리그는 3경기가 끝, 올스타전을 앞두고 열린 챌린지컵에도 잠깐 모습을 보였지만 제대로 경기를 소화하지 못했던 김한별이었다. 그저 고육책으로 보였다. 당시 이호근 삼성생명 감독은 "어차피 긴 시간을 뛸 수는 없다. 본인 의지가 강해 내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김한별이 변수를 만들었다. 주득점원은 아니었지만 신한은행의 맥을 경기 내내 끊었다. 1쿼터에만 11점을 올린 이미선(15점 4리바운드 6어시스트)과 에이스 해리스(28번 16리바운드)가 삼성생명을 이끌었던 경기다. 하지만 고비마다 김한별의 득점이 신한은행을 흔들었다. 힘과 투지가 좋은 김한별은 수비에서도 신한은행을 괴롭혔다.

 

20분 40초. 김한별은 14점 2리바운드를 기록했고, 초반 리드를 내준 신한은행은 끝내 단 한 번도 리드를 가져오지 못한 채 분패를 당했다. 해리스와 이미선은 시리즈 내내 신한은행이 충분히 예상했던 삼성생명의 주요 공격 루트였다. 하지만 공수에서 갑자기 등장한 김한별의 탱크같은 활약은 계산 밖이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레알 신한은행'의 왕조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호근 감독은 시리즈를 이긴 후, "모든 선수에게 고맙고, 특히 김한별한테 고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미 이 시즌이 자신의 은퇴 시즌임을 밝혔던 박정은(BNK 감독)은 "(김)한별이가 그렇게 해준 덕분에, 박정은이 그래도 저 신한은행을 상대로 악이라도 한 번 써보고 은퇴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이때 신한은행을 잡으면서 삼성생명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우승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했다. 챔프전을 앞두고 삼성생명은 자신감이 넘쳤고, 정규리그를 제패했던 우리은행 선수들은 조심스러웠다. 이호근 감독은 "가장 큰 산을 넘었다. 체력 관리만 잘 되면 좋은 결과가 기대된다"고 했고, 위성우 감독은 "삼성생명에는 농구를 알고 하는 선수가 많다. 큰 경기 경험 차가 너무 크다"며 불안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삼성생명은 3경기 만에 우리은행에게 패했다. 3경기 모두 10점 차 이상의 대패였다. 3경기 통틀어 삼성생명이 앞선 시간은 채 10분이 되지 않았다.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변수를 만들었던 김한별은 제대로 경기를 소화할 수 없었다. 2차전에 잠깐 경기에 나섰지만 채 4분을 뛰지 못했다. 1차전과 3차전은 결장했다.  그러나 삼성생명 관계자들은 "플레이오프 3차전 한 경기로 김한별은 올 시즌 자기 몸값을 다했다"고 했다.

 

 

 

1-2. 우리은행 왕조도 멈춰 세우다

 

그렇게 김한별과 삼성생명은 신한은행 왕조를 끝냈지만 왕좌의 주인이 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향후 꾸준히 이어진 우리은행 왕조로 인해 불운한 킹메이커가 되고 말았다. 신한은행의 독주가 끝난 이후에는 우리은행의 독주가 이어졌다. 거짓말처럼 신한은행의 6년 통합우승에 이어 우리은행의 6년 통합우승이 이어졌다. 당초 우리은행의 반란은 일시적일 것이며, 신한은행이 다시 패권을 가져갈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지만, 무너진 왕조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신한은행은 2014-15시즌까지 우리은행의 가장 강력한 대항마였지만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옛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패권을 내려놓은 4번째 시즌부터는 그 힘을 잃고 말았다. 찬란한 시절을 이끌었던 임달식 감독의 시대도 끝났다. 

 

특히 우리은행은 디펜딩 챔피언으로 맞이한 2013-14시즌, 외국인 선수 선발에 완전히 실패하며, 노엘 퀸(183cm, F)과 사샤 굿렛(196cm, C)으로 시즌을 치렀음에도 통합 우승에 성공했다. 이 후에는 샤데 휴스턴(183cm, F), 쉐키나 스트릭렌(188cm, C), 존쿠엘 존스(197cm, C), 모니크 커리(182cm, F) 등 좋은 외국인 선수들을 제대로 활용했다. 임영희, 박혜진, 이승아, 양지희 등 국내 선수들의 성장과 영향력도 리그를 지배했다. 양지희가 은퇴하자 김정은이 가세하며 압도적인 전력은 흔들리지 않았다.

 

2018-19시즌, WKBL은 외국인 선수 제도에 변화를 줬다. 2명 보유 1명 출전이었던 제도가 1명 보유로 바뀌었다. 하필 우리은행은 이 시즌, 외국인 선수 선발에서 2013년 이후 5년 만에 실패했다. 크리스탈 토마스(196cm, C)가 위력을 보이지 못했다. 모니크 빌링스(190cm, C)로 교체했지만 반전을 만들지는 못했다. 박지수와 카일라 쏜튼(184cm, F)을 앞세운 KB에게 1경기 차로 정규리그 우승을 내줬다. 우승 행진에 빨간불이 켜졌다. 계단식 플레이오프 제도는 정규리그 우승팀에게 체력 면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했기에 우리은행은 왕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상당한 부담을 안고 가야했다. 하지만 6년 전 신한은행이 그랬듯, 이 시즌의 우리은행에게도 정규리그 1위 팀을 저격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삼성생명 때문이었다.

 

삼성생명은 이번에도 안락한 3위였다. 캄 벨트(Calm Belt)였다. 선두권과 8경기 차로 멀어졌지만, 4위권으로 부터는 6경기 차로 앞서 있었다. 여유롭게 3위로 시즌을 마쳤다.

 

 

 

김한별에게는 부활의 시즌이었다. 부상 등으로 오랫동안 부침을 겪으며 평이한 시즌을 이어가던 김한별은 이 시즌, 정규리그 32경기에 평균 32분 55초를 뛰며 12.8점 9.1리바운드 3.7어시스트 2.0스틸을 기록했다. 2010-11시즌 이후 8년 만에 두 자릿수 득점을 올렸고 자신의 커리어 하이를 작성한 시즌이었다.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삼성생명은 우리은행에게 열세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김한별은 더 무섭다"며 기대를 숨기지 않았고, 이는 현실이 됐다. 

 

삼성생명은 1차전에서 81-90으로 패했다. 후반에 폭발한 박혜진(21점 4리바운드 4어시스트)과 빌링스(21점 14리바운드)를 막지 못했다. 티아나 하킨스와 김한별, 김보미가 5반칙으로 물러난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김한별은 5반칙 퇴장에도 불구하고 28점을 득점하며 맹활약했다. 그리고 이 기세는 시리즈 내내 이어졌다.

 

심기일전한 삼성생명은 김한별과 박하나의 득점이 터지며 2차전을 앞서나갔다. 전반에 10점차 리드를 잡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위기가 닥쳤다. 빌링스를 앞세운 우리은행이 3쿼터에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4쿼터 초반 결국 역전을 허용했다. 하지만 김한별이 힘을 냈다. 하킨스의 U파울과 퇴장이라는 악재가 닥쳤지만 김한별의 연속 득점으로 다시 찾아온 리드를 지켰다. 80-78로 앞서던 종료 45초 전, 김한별의 페인트존 득점으로 승리를 지켰다. 4쿼터에 10점을 더한 김한별은 27점 6리바운드 5어시스트로 팀 승리를 이끌었다. 1차전에 이어 2차전도 김한별이 최다 득점자였다.

 

마지막 3차전. 이번에는 우리은행이 기선을 제압했다. 빌링스와 김정은의 활약을 앞세워 7점차로 앞섰다. 그런데 3쿼터 들어 국내 선수들의 득점이 묶였다. 우리은행을 3쿼터 7점으로 묶은 삼성생명은 박하나를 비롯해 선수들이 고르게 득점에 가담하며 22점을 올리며 승부를 뒤집었다. 우리은행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최이샘과 빌링스의 활약이 이어졌다, 그리고 배혜윤의 U파울로 종료 1분 49초 전, 우리은행이 1점차로 따라붙었다. 배혜윤은 파울 아웃. 치명적인 위기가 닥쳤다.

 

그러나 여기에서 김한별이 승부를 결정지었다. 결정적인 스틸로 우리은행의 역전 기회를 막았고, 자유투 1개를 성공했다. 70-68로 앞서던 종료 25초 전, 승부를 결정짓는 3점슛을 꽂아넣었다. 73-68. 사실상 시리즈를 끝내는 득점이었다. 1차전을 내준 삼성생명은 리버스 스윕으로 우리은행을 떨어뜨렸다. 6년 전 신한 왕조를 종식시켰던 삼성생명이 우리 왕조에도 마침표를 찍었다.

 

김한별은 3경기 평균 38분 36초를 뛰며 25.3점 4.7리바운드 6.3어시스트로 시리즈를 지배했다. 에이스였고, 확실한 득점원이었다. 하킨스가 외국인 선수로서의 위력을 확실히 보여주지 못했지만 김한별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6년 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왕좌에 오르지는 못했다. 기다리고 있던 KB를 저격하지 못했다.

 

체력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뒤로 갈수록 걸음이 무거웠다. 1차전 4쿼터는 11-26으로, 2차전 4쿼터는 2-17로 밀렸다. 두 경기 모두 20점 차 이상으로 대패했다. 1차전에 12점 4리바운드 12어시스트로 분전했던 김한별은 2차전, 9점 9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쿼터에만 9점을 올렸고 후반 무득점으로 체력적인 한계를 절감했다. 

 

3차전에는 교체없이 40분을 뛰며 28점 10리바운드 6어시스트 3스틸로 다시 한 번 괴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쏜튼(29점 14리바운드)과 박지수(26점 13리바운드 2블록)를 앞세운 KB를 넘을 수는 없었다. 초반 리드를 잡았지만 결국 역전을 당했고 경기를 내줬다. 1차전에서 26점 8리바운드로 경쟁력을 보였던 하킨스가 2차전과 3차전 모두 6점 5리바운드에 그치며 외국인 선수답지 않은 모습을 보인 것이 아쉬웠다.

 

 

 

2. 국가대표 김한별

 

국가대표와 관련해서 김한별의 기억이 마냥 유쾌한 것은 아니다. 김한별은 2011년 특별 귀화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 국적을 획득했다. 국가대표로서의 활약을 기대하고 진행된 귀화였다. 하지만 부상 이슈가 있었던 김한별은 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귀화에 보수적인 우리나라에서 귀화 후 국가대표로 활약하지 못한 김한별의 예는 이후 스포츠에서의 우수 인재 귀화에 더 큰 걸림돌이 됐다. 특히 여자농구는 이후 첼시 리 사건까지 겪으며 귀화와 관련해 법무부로부터 곱지 못한 시선을 받는 대표적인 분야가 됐다. 

 

하지만 김한별과 국가대표의 인연이 그렇게 끝난 것은 아니다. 런던 올림픽과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국가대표로 활약하지 못했지만, 2017년 이후 3년간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2017년 아시아컵을 시작으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스페인 FIBA 여자농구 월드컵, 도쿄 올림픽 지역 예선과 최종 예선까지 활약했다. WKBL에서 확실하게 먹혔던 언더사이즈 빅맨으로서의 역할이 세계 무대에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코트에서의 투지와 리더십은 국가대표에서도 여전했다. 그는 국가대표로 대회에 나서는 것에 대해 "군인이 전투에 나서는 것과 같은 것"이라며 "국가대표로 경기에 임할 때는 늘 군인의 마음으로 경기에 나선다"고 했다.

 

경기를 마친 후 걷지 못하던 박지수를 업고 나온 선수가 김한별이었고, 5년 만에 중국을 잡았던 경기에서 마지막 수비, 박지수의 손에 걸린 볼을 스틸로 연결하며 1점차 승리를 지킨 것도 김한별이었다. 끝내 올림픽 본선 무대를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한국 여자농구가 올림픽 본선에 복귀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그리고 국가대표 커리어는 선수 김한별에게도 하나의 큰 분기점이 됐다.

 

승부욕과 투지가 강했던 김한별은 코트에서 거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상대 선수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김한별에 대한 대부분의 시선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삼성생명 선수들은 "킴(킴벌리 로벌슨, 김한별) 언니, 그런 사람 아닌데..." 라고 했다. 코트 안에서는 동료들과 연습 경기를 할 때도 전투적이지만, 코트 밖에서는 장난도 잘 치고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김한별의 승부욕은 유별났다. 힘이 세고 몸싸움도 잘하는 선수였고, 작은 마찰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때로는 위험한 파울도 범했고, 상대에게 웃어주는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 코트에 넘어졌을 때에도 상대가 손을 내밀면 잡지 않고 오히려 등을 돌렸다. 

 

줄곧 미국에서만 농구를 했고, WKBL에 입단 후에도 삼성생명에만 있었던 김한별의 모습은 모두에게 이런 이미지였다. 코트 밖에서의 다른 모습은 삼성생명 선수들만 알 뿐,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우리 말을 알아듣지만, 영어로 소통했던 탓에 삼성생명이 아닌 다른 선수들은 김한별에 대해 직접 느끼고 확인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국가대표를 다녀오면서 이러한 분위기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국가대표 선수들도 김한별과 함께 생활하며 그의 코트 밖 모습을 경험하게 됐고, 김한별 역시 삼성생명 소속이 아닌 다른 선수들 중에서 친분을 쌓은 이들이 생겼다. 그런다고 김한별의 기본적인 경기 방식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마냥 투쟁적이기만 했던 그가 경기 전 다른 팀 선수들과 대화를 하거나 장난을 치는 모습도 볼 수 있었고, 다른 팀 선수들도 김한별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좋은 감정을 말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코트에서 상대 팀 선수에게 더없이 냉정했던 김한별은 이후 몸싸움 후 넘어진 상대 선수를 일으켜주기도 했다.

 

만약 부상 악재가 없어, 김한별이 조금 더 일찍 국가대표로 활약할 수 있었다면, 한참 모나고 날카롭게만 보였던 그의 코트 위 경쟁이 조금은 더 밝은 모습으로 진행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3.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난 별

 

김한별은 선수 생활이 순탄했던 선수는 아니다. 2014년에는 부상으로 인해 조기 은퇴도 고려했다. 2014-15시즌은 아예 뛰지 않았다. 이듬해 복귀해서 9년을 더 활약했지만, 고질적인 부상에 대한 관리는 필수였다. 삼성생명은 물론 이적 후 BNK 역시 김한별에 대한 관리에 철저했다. 

 

이러한 김한별의 선수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꼽으라면 역시 2020-21시즌일 것이다. 이 시기가 그의 전성기였다.

 

기복이 심했던 김한별은 신인상을 수상한 다음 시즌,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와는 전혀 무관한 모습을 보였다. 2010-11시즌, 27경기에 평균 27분 42초를 뛰며 12.6점 7.0리바운드 3.1어시스트 1.6스틸을 기록했다. 이후 부상 등으로 신음하며 평균 한 자리수 득점에 묶였던 김한별은 2018-19시즌 32경기 평균 32분 55초를 뛰며 12.8점 9.1리바운드 3.7어시스트 2.0스틸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3시즌 동안 김한별의 위력은 확실하게 이어졌다. 2020-21시즌에는 24경기 평균 27분 49초로 출전 시간이 줄었지만 13.9점 8.2리바운드 4.3어시스트로 여전한 활약을 펼쳤다.

 

김한별의 활약과는 별개로 삼성생명에게는 버거운 정규리그였다. 기존 양강인 우리은행과 KB는 물론 신한은행에도 밀렸다. 박하나가 부상에서 완전하게 회복하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삼성생명의 특징이 된 정규리그 흐름이 이어졌다. 강팀과의 경쟁에는 끼지 못했고, 확연히 가라앉은 하위권 덕분에 무난하게 플레이오프에 나서는 모습이었다. 이번에도 5할 승률에 실패했지만 4위에 올랐고, 플레이오프에서 1위 우리은행을 만났다. 그리고 기적같은 승리를 이뤘다.

 

1차전을 패했지만 이번에도 2-3차전을 내리 이겼다. 노장 김보미의 투혼 속에 젊은 유망주들이 연동했다. 팀의 핵심으로 올라선 윤예빈이 박혜진을 상대로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우리은행만 만나면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배혜윤이 3차전에 분전하면서 또 한 번 우리은행을 쓰러뜨렸다.

 

 

 

김한별은 이전처럼 드라마의 주연은 아니었다. 2차전에 22점 9리바운드 6어시스트로 맹활약했지만, 3차전에는 7점 8리바운드 4어시스트로 과거 '플레이오프 김한별'을 기억하는 이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김한별의 진짜 무대는 챔피언 결정전이었다.

 

김한별은 1차전부터 폭발했다. 3점슛 5개 포함 30점  6리바운드로 와이어 투 와이어 승리를 이끌었다. 연장 접전이 펼쳐진 2차전은 WKBL 챔프전 역사에 남을만한 위닝슛을 성공하며 2연승을 만들었다. KB의 무서운 저력에 3-4차전을 내줬지만 마지막 5차전, 1쿼터부터 9점을 집중시키며 기선을 제압했다. 꾸준히 리드를 지킨 삼성생명은 한 때 17점 차로 앞섰고 다시 한 번 와이어 투 와이어 승리를 거두고 정상에 올랐다. 정규리그 5할에도 못 미친 4위 팀이 챔피언에 오른 WKBL 유일의 기록을 만들었다.

 

김한별은 챔프전 5경기에서 두 번의 연장으로 인해 평균 41분 12초를 뛰며 20.8점 7.8리바운드 5.6어시스트로 팀 우승을 이끌었고, 챔프전 MVP에 올랐다. 김한별 프로 커리어의 유일한 우승이자, 유일한 MVP였다.

 

 

 

가장 높은 곳에 섰던 김한별의 커리어는 이후 조금씩 내리막으로 이어졌다. 챔프전 MVP였지만 트레이드 대상이 됐다. 우승을 차지했지만 객관적인 전력에서 KB-우리은행보다 확연히 떨어졌던 삼성생명은 우승 후, 젊은 유망주를 대거 영입하면서 김한별을 포기했다. 트레이드 거부권이 있던 김한별은 BNK의 신임 사령탑으로 박정은 감독이 부임하자 이적을 결정했다. 삼성생명 내부에서도 김한별을 가장 이해하고 잘 컨트롤 할 수 있는 인물은 박정은 감독이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김한별 스스로 현역 시절부터 가장 존중하고 따르던 선배이자 농구인이 박정은 감독이었다. 

 

박정은 감독은 '유망주의 무덤'이 된 지 오래인 BNK에 부임하면서 "전체 전력의 2/3를 갈아 엎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뿌리 깊은 패배 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분위기의 쇄신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구성원을 대거 교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한 승부욕과 리더십, 고비에서 이기는 능력과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김한별을 영입했다.

 

우승과 챔프전 MVP를 차지한 후 김한별의 기량은 조금씩 하락했다. 리그 최고의 센터 박지수를 멈춰 세우던 힘도 예전만 못했다. 평균 득점은 다시 10점 미만으로 떨어졌고, 출전 시간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이적 첫 해, BNK를 플레이오프로 이끌었고, 2022-23시즌에는 정규리그와 챔프전 준우승을 차지했다. 13.2점 8.9리바운드로 김한별 역시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부상과 팀 내홍까지 겹친 2023-24시즌은 아쉬움으로 마쳤다. 그래서 이 시즌의 마무리와 함께 은퇴를 선택하게 된 것이 조금은 초라한 그림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비록 삼성생명의 새로운 왕조를 탄생시키지는 못했지만, WKBL 정상의 역사가 바뀔 때마다 그 중심에 있었고, 명가 삼성생명을 15년 만의 챔피언으로 이끌었으며, KDB생명 시절 이후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의 터널에 갇혀 있던 BNK가 플레이오프 무대로 올라서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어쩌면 김한별은 여전히 순혈주의와 배타성이 강한 대한민국 스포츠계에 혼혈과 귀화선수에 대한 내부적인 경각심을 강하게 던진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아쉽게 은퇴를 결정하고 미국에서 제 2의 삶을 살아간다고 하지만, 그래도 다음 시즌 BNK와 삼성생명과의 경기에서 성대한 은퇴식이 펼쳐졌으면 하는 아쉬움을 담아 글을 마친다.

 

 

사진 = 이현수, WKBL, FI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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