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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ize/gIbberish

그 날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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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월드컵 폴란드 전 첫 승 20주년 기념으로 대학 야구 동아리 OB 모임에 나갔다. (따지지마. 그냥 그랬어.)

 

(늘 그랬듯이) 지각했다. 여유 있게 덕아웃에 들어가다가 욕을 한 바가지 쳐 먹었다. 원래 스포츠는 옆에 앉아서 훈수 두는 거라고 배웠다. OB 중에서도 왕고 라인이라 직업정신을 살려 경기 분석을 하고 있었다.

 

. 간만에 왔으니까 빠따라도 한 번 휘둘러.”

 

? -_-;;; 대타로 나갔다. 9년만에 하는 야구다. ... 겁나 어색해. 하지만 마치 어제까지도 스윙 5천개 했다는 자세와 오만함으로 어슬렁 어슬렁 타석으로 들어섰다. 길이가 짧아 그렇지 몸매는 슬러거다.

 

보아라. 누가 봐도 한 방 걸리면 장외로 날려버릴 것 같은 ㅎㄷㄷ한 포스가 아니던가... 베리 본즈는 아니어도 데이비드 오티즈급의 아우라는 된다고 본다!!!

 

... 투수가 쫄았나 보다. 4개가 모두 볼이었다. 스트레이트 볼넷. 역시... 상대도 고수는 알아 본 거다. 9년 만에 들어선 타석이지만, 신이 내린 선구안은 노안과 시력 저하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 물론 내 동기 쉐끼는 투수가 그냥 제구가 안 되네. 야구 처음 하는 여자애가 빠따 거꾸로 들고 서있어도 볼넷이야라고 했지만... 이 쉑... 선출만 아니었어도 나의 해박한 야구 지식과 빼어난 매커니즘으로 반박해줬을텐데...

 

 

상대의 잡히지 않은 제구에도 당황하지 않고 무사 만루에서 볼넷을 골라낸 4번타자같은 위용을 자랑하고, 홈런이라도 친 것처럼 1루로 걸어 나가는 당당함! 졸라 카리스마 있어!

 

여유 있게 1루에 나가서 처음 보는 상대 1루수 아저씨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다음 타자가 좌익수 쪽으로 직선타를 날렸다.

 

모든 사람들이 타구가 잡히느냐 빠지느냐에 집중한 상황. 나는 1루에서 2루 방향으로 가고 있다 보니, 이 상황이 누구보다 잘 보였다. 절대 못 잡는 타구였다. 영민하고 날렵하게(적어도 내 생각엔 누구보다 날렵했다. 몸매와 키 빼고는 조수행이었다.) 스타트를 끊었고, 공은 당연히 좌익수 뒤로 빠졌다. 2루 베이스를 밟으며 일단 3루 도착할 즈음에 외야 한 번 보고 홈까지 간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타구 보며 2루를 밟다가 발목을 접질렀다. 이런 썅! 그리고 두 걸음 정도 더 갔는데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게 아닌가!!!! 와우... 자빠졌다. -_-;;;;

 

사실 여기서 비참하게 데굴데굴 굴러서 2루로 귀루 했어야 한다. 하지만 공이 빠지는 걸 확인한 나는 일어나서 뛰면 3루까지는 안착이라는... 내 몸뚱이는 조금도 고려치 않은 오만방자한 생각이 들었고, 넘어진 주제에 아주 자연스럽게 앞구르기를 하고 다시 발딱 일어나서 3루로 뛰었다....

 

... 그렇게 한 걸음 정도 걷고 또 다리에 힘이 마법처럼 풀리며 자빠졌다. 확신이 들었다.

 

... 나 못 움직인다...’

 

남들이 볼 땐 뭔가 크게 다쳐서 못 일어나는 것 같았겠지만, 실상 쪽팔려서 갑주 속에 숨은 아르마딜로마냥 자빠져 웅크리고 있는 나에게 상대방의 낯설고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세요?”

 

아무 말도 못했다. 그리고 잠시 후... 글러브가 둔탁하게 내 목을 툭 쳤다.

 

아웃!”

 

해당 장면의 영상이 있는데, 솔직히 나의 위신과 사회적 지위와 또 내가 몸담고 있는 직장과, 속해있는 직종의 자존심과 명예를 위해 올릴 수가 없다. ㅠㅠ

 

-_-;;;;;;;;

 

후배들의 부축을 받고 덕아웃으로 들어왔다. 다들 걱정했단다. 몸도 안 풀고 앉아있다가 갑자기 뛰어서 심장에 문제가 온 줄 알았단다...

 

고맙다.. -_-

 

다들 내가 다리 풀려서 자빠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영장류로 태어나 2족 보행을 한 것이 벌써 40년은 넘었는데, 고작 30미터 뛰고, 다리 풀려 자빠졌다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ㅠㅠ

 

하루가 지났다. 무릎이 겁나 아프다. 팅팅 부었다. 손바닥도 아프다. 자빠지는 와중에,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땅바닥을 짚었나보다. 온 몸이 다 아프다. 플레이 시간이 채 3분도 안 됐건만...

 

병원에 가면 10년 넘게 나를 보고 있는 돌팔이 의사가 살을 안 빼니까 또 이런...” 으로 시작해서, 이제는 정말 살을 빼야 겠다는 생각이 들죠?”라고 할 거다.

 

...

 

아니!!!!!! 고작 이딴 이유로 살을 뺀다고...? -_-

 

됐어! 여러분, 야구가 이렇게 위험한 운동입니다.

 

다음 주부터는 7년 만에 당구나 쳐야겠다. 역시... 안전이 최고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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