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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ize/gIbberish

직업이라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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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내일>을 재미있게 보고 있었다. 그런데 말미에 이르면서 또 한 번 등장했다.

 

‘아... 여기서도 기자는 쓰레기구나...’

 

드라마나 영화의 장치에서 기자가 악역으로 참 쏠쏠할 것 같다. 내가 극본을 써도 그럴 거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그렇다 쳐도 그 등장 빈도가 참 많은 것 같긴 하다. ‘저런 기자들만 있는 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디 가서 그런 얘기 해봤자 닥쳐라 기레기야라는 답만 돌아올 테니,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맞는 건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도 권언유착으로 인한 폐해가 분명 존재했기에(그리고 존재하기에), 이 또한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다.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악역의 기자들과 비교하기에 나는 일단 매우 초라한 존재다. 일단, 급 자체가 그 정도가 아니다. 영향력 자체가 미미하니 박미미라 해도 될 거 같다. 매일 수백 건의 기사를 읽으며, 가끔은 어떤 기사에 대해 “이렇게 되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미 적폐이고, 고인 물이고, 꼰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왜, 언제부터 기자가 됐을까?

 

생각해보면 학창시절, 장래 희망으로 기자를 생각했던 적이 없었다. 꿈도 희망도 특별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도 좋은 대학에 대한 목표가 없었다. 2 수능 모의고사 때 별 의미 없이 지망대학 지망학과에 이화여대 무용과를 적어 수석을 했다가 담임선생님한테 죽도록 맞았던 적도 있다.

 

목표와 의지가 박약하니 결과가 따르지 않는 건 당연하다. 수능 시험에서 부모님의 기대에 크게 못 미쳤고, 원서를 쓰는 날, 담임선생님이 아버지께 연신 고개를 조아리시는 당황스런 상황도 벌어졌다. 원서 쓸 때, 못난 아들 때문에 부모님이 선생님 앞에 죄인이 된다던 시절, 뜻밖의 효도...를 했다.

 

담임선생님은 학교를 제시하지도 않고 무조건 재수를 권유했고, 아버지는 재수는 열심히 해도 성적이 나오지 않는 애들이 해야죠. 제가 재수 해봐서 아는데, 우리 애는 재수 하면 더 안 좋을 겁니다. , 공부 안 해요라고 단언하셨다.

 

슬프지만 반박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었다. 교차지원도 없던 시절. 가군, 나군, 다군 세 군대에 원서를 넣으면서 나의 의지는 약 1g 정도 들어갔던 것 같다. 성적에서 부모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 죄인이기에 의견을 나불댈 엄두도 못 냈다. 어머니는 수능 성적 나온 날부터 몸 져 누우셨으니, 사실상 아버지의 의지가 컸다.

 

그러다 보니 내 전공에 대한 의미와 의지도 없었다.

 

전공이 경제통상학이다. 수학을 극도로 못하고, 고교 2(4학기)간 배운 정치경제에서 정치는 수, 경제는 미를 받았던 내가 이걸 전공한다고? 아버지께 “수학 자신 없다”고 말씀 드렸지만(이게 아마도 나의 의지 1g), “문과가 무슨 수학을 해? 안 하니까 그냥 가로 정리됐다.

 

수학... 겁나 많이 한다.

 

1학년 1학기 때 경상수학을 시작으로 계량경제, 회계, 통계... 상식적으로 수학이 안 나올 수가 없다. 고등학교 때, 가장 싫었던 게 수학과 그래프’였고, 이것이 문과 선택의 큰 이유 중 하나였는데...

 

아마 문과에서 수학과 그래프를 다루는 거의 유일한 전공이 우리 과였을 것이다. 물론 아버지는 그건 산수와 그림이라고 일축하셨지만, 아버지 또한 수학과 거리가 먼 것으로 보아, 솔직히 무책임이었다고 생각한다.

 

, 그랬기에 애당초 전공을 살려 뭔가를 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공무원을 준비하는 친구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CPA를 준비하던 친구들, ‘Dream JobKOTRA’라고 하던 친구들, 대기업보다 인기가 많았던 은행 취업... 그런 기억이 있지만, 솔직히 나 스스로는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 선명하지 않았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취미로 시간을 때우던 게 직업처럼 돈을 벌 수 있는 상황이 되면서, 전공에 대한 간절함이 더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노래하고 건반을 치는 게 훨씬 생산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또한 직업으로 삼겠다는 마음과 의지는 전무했지만 적어도 내 생계에는 큰 도움이었다. 학점은 꼼수와 교수님과의 친분으로 무척 선방했다.

 

유학을 갔을 때 전공은 Communications였다. 미디어 관련이지만, 저 학부 내의 Journalism에는 관심이 없었다. 호주에서 는 잘 놀고, 미국에서는 졸업도 못하고 여자 친구 핑계로 일찌감치 도망쳐 온 상황이어서, 전공이나 학업에 대한 의욕은 더욱 없었다. 이게 그 무렵 나의 배경이다.

 

2003년 중반이었나? 이 당시에 스포츠 신문의 위기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온라인 매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던 시기다. OSEN, 엑스포츠 뉴스도 아마 2002~2004년 무렵에 등장한 걸로 안다. 엑스포츠 뉴스는 처음, 스타일이 지금과는 달랐던 느낌이고, 먼저 생겼던 스포탈코리아는 축구 전문 매체였다. 그때 피치(Pitch, 이후 싸커저널)라는 축구 온라인 매체가 등장했고, 필진으로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스포츠는 어려서부터 좋아했다. 특히 공놀이가 좋았다.

 

야구, 축구, 농구, 배구가 모두 관심의 대상이었고, 미취학 아동일때부터 OB베어스, 포항제철, 삼성전자, 동방생명, 고려증권, 한일합섬을 응원했다. 지역 연고나 홈구장이 어디인지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포항스틸러스 서포터였고, 붉은악마였다. 유럽축구는 아마 1990년대 초반부터 홍콩 스타TV로, NBA와 MLB는 AFKN으로 봤다.(NBA와 MLB는 WWF때문에 조금 더 일찍 봤다.)

 

글쓰기는 그나마, 내가 남들보다 잘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생각해보면 학창시절 받은 상은 초등학생 때의 음악을 제외하면, 전부 글쓰기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필진을 하기로 했고, 그러다보니 기자가 됐다. 유학생활을 대충 정리하고 와서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취업이 되어버렸다. 큰 포부가 있지도 않았다. 그저, 취업전선에 내몰려 힘든 대학 4학년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취준생의 치열함에 내몰리지 않아도 된다는 게,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나태하게 살아온 인생에 비하면 참 복 받은 취업이었다. 그렇게 축구 전문 기자로 기자라는 직업을 처음 경험하게 됐다.

 

그러다가 ()홍명보장학재단에서 제의를 받고, 직장을 옮겼다. 장학재단 업무, 스포츠 마케팅과 이벤트 등을 배웠고, 담당했다. 이제는 없어진 홍명보 자선 축구경기에도 투입됐고, ‘홍명보 어린이 축구교실을 담당하기도 했다. 수원에 처음 창단한 축구 교실을 맡았고, 서초 센터가 오픈할 때는 행정적인 정지작업도 했다. 이 후에 축구교실에서 선수를 목표로 하는 엘리트반을 만들었고, 기존 학교 축구부와 차별성을 두기 위해 여러가지 시도를 했었다.

 

장학재단과 관련된 업무도 맡았다. 재단과 긴밀한 관계였던 푸마를 통해 스포츠 브랜드에 대해서도 많은 걸 배웠다. 아주 길진 않았지만 몇 년간 많은 걸 배웠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재단에서는 객원기자를 할 수 있으면 계속 하라고 했다. 회사 업무에 방해만 안된다면 투잡이든 쓰리잡이든 괜찮다고 했다.

 

그래서 하던 걸 계속했다. 대학 때부터 하던 일은 가장 큰 수입원이었고, 싸커저널에서는 정기자가 아닌 객원기자로 일을 했다. 2006 독일월드컵을 앞두고는 DAUM에 축구 칼럼도 연재했다. 싸커저널을 그만두고 얼마 지났을 때는 골닷컴에서 객원기자 제의가 들어와서 그걸 또 했다. 뭔가 축구와 관련된 분야에서는 선수 말고 다른 모든 것을 다 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당시 재단에서는 (주)엠비스포츠라는 이름으로 선수 에어전트도 하고 있어서, 여기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일도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국내 대회, 국제 대회를 모두 참가해봤고, ‘홍명보’라는 브랜드의 위력으로 방송에도 나가는 일이 있었다. 그렇게 잘 지내다가 2009년 가을이었나? 모든 일을 그만뒀다.

 

직업에 대한 회의, 재충전의 의지... 뭐 그런 건 아니었다. 장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선택한 삶의 이정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준비하기에는 이미 서른을 넘은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직장을 그만두고, 거의 1년을 사진 찍고 여행을 하며 다녔다. 고민이 많았지만 다른 이들처럼 치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여행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에세이를 남기는 게 적성에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유학생 시절에는 한 번도 가지 못했던, 호주 울루루에 올라 반대편의 카타추타를 바라보며, ‘평생 이렇게 사는 게 어쩌면 더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차를 끌고 국내 전국 여행도 했고, 가 보고 싶었던 나라들도 가봤다. 일 때문에 방문했던 때와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여행 작가에 도전해볼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무렵, 문화저널21에서 제의를 받았다. 사장 면접을 봤다. 애초에 문화저널21은 정치, 경제, 산업, 문화를 다루는 매체. 스포츠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걸 담당하면 스포츠도 할 수 있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문화저널21에 입사했다.

 

온라인 뉴스 문화저널21’, 주간지 이슈 앤 포커스’, 월간지 이코노미 컬처를 전부 경험했다. 일간/주간/월간으로 담당 파트가 나눠진 게 아니라, 결국 기자들이 이 전부의 영역에 다 투입되어야 했다. 그런 와중에 산업과 문화를 담당하면서, 꾸준히 스포츠를 놓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전공을 살려서 경제나 산업 쪽으로 올인하라고 했지만 전공을 살릴 거였다면 기자는 되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전공을 살리기에는 그 지식과 기반이 습자지와 같았다.

 

비교적 빠른 나이에 차장이라는 명함은 달았지만, 직업의 낙은 스포츠 현장을 가는 것뿐이었다. 회사의 방향과는 점점 틀어졌다. 사장은 처음 약속과는 달리 돈 안 되는스포츠를 꾸준히 배제하려 했고, 결국은 스포츠는 하지 마라라고 통보했다. 그래서 사표를 냈다. 스포츠를 할 게 아니라면 기자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다만 백수를 오래 할 팔자는 아니었는지, 문화저널21에 국장으로 계시던 분한테 바로 연락이 왔다. 그만 뒀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주간신문이지만 와서 일 해볼 생각은 없냐고 제안을 줬다. 전 직장보다 더 높은 조건을 보장했고, 일도 더 적다는 메리트가 있었다. 게다가 여기는 스포츠를 없애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별로 고민하지 않고, 월급 받으러 다시 취직을 했다. 거기가 토요경제신문이었다. 현대경제신문과 같은 계열이라 종종 두 곳에 같이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비록 스포츠만 전담으로 할 수는 없었지만, 전 직장에서 이미 익숙했던 터라, 아무렇지 않게 적응했다.

 

그런데 정치부로 발령이 났다. 정치를 담당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새 담당부서는 정치만 맡아야 하는 곳이었다. 승진 발령이었지만, 취소해달라고 했다. 안 된다고 해서 또 사표를 냈다. FA가 된 거다. 그리고 창간 5개월 차였던 농구 전문지 더 바스켓에서 제안을 받았고, 20156월부터 편집장이 됐다. 20175월에는 더 바스켓루키와 합병하며 루키 더 바스켓의 편집장으로 지금까지 연명 중이다. 처음 기자를 시작한 걸로 보면 올해가 20년째, 그리고 편집장은 7년째가 되어 간다.

 

 

여자농구 취재를 많이 하다 보니, 종종 남자 농구는 싫어하냐는 말을 듣는다.

 

하아.. 하나도 안 싫어한다. 아무래도 남자 농구가 여자 농구보다 기자들에게도 선호도가 높기 때문에, 정기자들에게 남자 농구를 우선 배정하다 보니 편집장이 된 후, 개인적으로 여자 농구 비중이 엄청나게 높아졌다. 전 직장에서는 그래도 이 정도까지 비중이 일방적이지는 않았었다.

 

스포츠, 정확히는 축구 기자로 먼저 시작을 하면서, 여자 농구 취재의 빈도가 비약적으로 높아진 건 2011년 무렵 부터였다. 그 전까지는 겨울에 농구와 배구를 모두 취재했고, 농구의 경우는 남자농구의 비중이 훨씬 높았다.

 

2011-12시즌, 신한은행이 통합 6연패를 할 무렵, 지금은 중앙일보에 있는 송지훈 선배가 휴일 날 쉬고 있는 나를 현장과 회식 자리에 데려가면서 여자농구 비중이 확연히 높아졌다.

 

그때 나는 월간지 인터뷰를 약속해 놓고 해외 대회 성적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펑크를 낸 한 당구 선수 때문에, 빈 페이지를 채울 선수 섭외에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내가 이로 인해 난감한 상황이라는 이야기에 신한은행 프런트에서 김단비 인터뷰는 어떠냐고 먼저 제안을 해왔다. 마감까지 2일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신한은행에서 배려를 해줘서 마감 당일에 선방할 수 있었다.

 

이 후로 여자 농구에 신경을 더 썼다. 그 전까지 여자 농구 선수에 대한 와이드 인터뷰를 진행하지 않았었지만, 김단비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여자 농구 프로 선수가 채 100명이 안 된다는 걸 알았고, ‘하루 2명씩만 공부하면, 두 달 만에 선수들을 다 파악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시간이 지금에 이르렀다.

 

기자라는 직업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대중들이 간접 경험으로 만날 수 있는 이들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선수는 물론, 정치인, 경제인, 예술인, 연예인, 사회적 이슈의 대상, 혹은 범죄자까지,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뷰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나에게 무언가의 교훈을 주는 이들이었다. 단점은 이라는 이름으로 갖고 있던 열정이 무섭도록 빨리 식는다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다양한 종목과 많은 대회를 취재했다. 크게 자랑할 것은 아니지만, 집안 어느 구석에 수북하게 자리잡은 수많은 취재 ID카드 뭉치를 보고 있으면 뜻밖의 뿌듯함도 든다. 여전히 철없는 내가 그래도 열심히 살아왔다는 훈장처럼 여겨진다. 2002 월드컵 입장 티켓만큼 개인적으로는 의미 있는 가치일수도 있겠다. (그래 놓고 여기저기 분실하거나 버리고 온 ID카드가 많다는 건 참...)

 

2004 중국 AFC아시안컵, 피스컵, 2014 인천 아시안게임(이때 남녀 농구대표팀의 금메달 획득을 취재했다), 2018 터리픽12 같은 국제 대회,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수많은 A매치, WNBA, 국내 프로야구, 프로축구, 프로농구, 프로배구 등 많은 종목을 취재했다. WWE의 한국 투어, 김연아의 올댓스케이트, 손연재의 리드믹 올스타도 다녀왔다. ‘코리언 좀비’로 명성이 올라섰던 정찬성 선수에게 직접 길로틴 초크를 당해본 최초의 기자였을 것이다. 그때는 몰랐는데 사진을 보면 얼굴색이 가관이다. 사진 찍은 윤희곤이가 특별히 보정을 한 게 아니라는데, 얼굴색을 보면 죽지 않은 게 다행이다. (뭐 트집을 잡는 건 아니지만, 일반인인 기자를 상대로 정찬성 선수도 굳이 저렇게까지 열심히, 최선을 다해 기술을 걸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면서, 그날 내가 인터뷰에서 무슨 실수를 했던 건가... 하는 반성도 하게 된다.) 

 

스포츠가 아니면 기자를 할 이유가 없다라고 했지만, 개인적으로 정치, 경제, 산업, 사회, 문화부를 모두 경험해 본 것도 결과적으로는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대통령 취임식, 청와대, 국회, 정부청사에 취재를 가봤고 물론 대한민국 기업순위 1위를 다투는 그룹들도 담당해봤다. 국제 모터쇼를 여러 번 취재해 본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아직도 산업부 내용에 대해 내게 꾸준히 보도자료를 보내주고 계신 분들도 있다.

 

하지만 2014년 4월에는, 기자로서 절대 해서는 안되는 가장 큰 잘못을 범했고, 용서받을 수 없는 실수는 평생 내가 안고 가야하는 멍에가 됐다. 속죄를 위해 딴에는 노력을 한다고 했지만, 턱없이 부족함을 안다. 내 초등학교 개교기념일이었던 그날이, 2015년부터 난 여전히 버겁다.

 

20년. 내가 기자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동안, ‘기자를 보는 외부의 시선은 그대로인 것 같다. 아마 내가 이 직업을 그만두는 날까지도 바뀌지는 않을 것 같다.

 

환경의 변화로 글만 잘 쓰는 기자의 쓰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멀티가 가능해야 하고, 언어적 능력과 글쓰기 자체는 특장점이 아닌 기본 소양이 되고 있다. 매체도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것들을 시도한다. 우리도 유튜브 채널을 열고, 영상 콘텐츠를 서비스하며 사업 다각화를 모색하고 있다. 월간지의 운영과 변화도 늘 고민이다. 결과와 효과는 모르겠지만, 과정이 순탄치는 않다.

 

콘텐츠에 최대한 내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많아지고 있다. 종목 인기와 저변 확대를 위해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젊은 층을 타겟팅하기에 나는 분명 구세대이고, 노력으로 채우기 힘든 간극이 존재한다. 그것은 시선의 차이일 수도 있고, 생각의 차이, 표현의 차이일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냥 나 자신이 그 차이 자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뉴스를 읽다 보면 가끔 노욕에 눈 먼 선배 세대들을 볼 때가 있다. 아마도 자신들이 발전의 흐름에 걸림돌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할 것이며, 스스로는 언론인으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자부할 것이다. 어쩌면 나도 이미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요즈음이다. 그래서 칼럼 형태의 기사를 쓰는 것이나 영상에 나가는 것이 올바른 지에 대한 고민이 많다. 역할의 대안을 만들어야 하지만, 작년과 올해, 내 계획은 모두 어긋났다.

 

 

그렇다고 하루하루가 안락한 것은 아니다. 1년에 절반 이상은 하루 2-3시간만 자며 살고 있다. 시즌이 시작되면 삶 자체가 그렇게 돌아간다.

 

현장을 다녀온 후, 해당 경기를 다시 보기로 본다. 그 후에는 내가 현장에 있느라 보지 못했던 다른 경기들을 봐야 한다. NBA는 생중계 경기를 보고 그 외의 경기 중 하이라이트가 제공되는 것들도 본다. 보지 못한 빅 경기는 다시보기로 본다. 기사를 쓰고, 후배들의 기사를 봐줘야 하고, 기타 취재를 한다. 그리고 편집장은 기자의 영역이라기보다 회사원의 영역에 가까운 일도 하게 된다. 아니, 때로는 그 일이 더 많다. 보고서, 기획서, 제안서, PT가 끊이지 않는다.

 

큰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긴 전인 2017년에 병문안을 위해 1주일간 호주를 다녀온 것이 나의 마지막 휴가였다. 편집장이 된 후 7년간, 정기 휴가를 써 본건 그때가 유일하다. 부지런함과 성실함이 존재치 않는 내게, 이런 일정은 어쩌면 가장 큰 고문이다. 성격이 좋지 못하여, 1년에 평균 2-3번은 응급실 신세를 져야 한다.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속없이 편하고, 일없이 마냥 좋아만 보일 것이다.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기자를 보며 아쉬워하는 내가, 거울을 보며 주제파악을 못하는 사람이 되기 전에, 이 모든 것으로부터 정녕 자유로워질 수 있으면 좋겠다.

 

하아... 드라마를 보다가 내뱉는 푸념치곤 더럽게 장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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