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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ize/iNside sports

새벽, 카톡,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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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이었다.

 

‘This is the moment’<지킬 & 하이드> 넘버이기 이전에, 바르셀로나 캄프 누에서 열린 98-99 UCL 결승, 테디 셰링험의 기적 같은 동점골 이후, 데이비드 베컴의 코너킥 직전에 코멘테이터가 말했던 한 마디였다. 그 마법 같은 한 마디 후, 베컴의 발을 떠난 공은 셰링험을 거쳐 솔샤르의 역전골로 이어졌다. 주제가로 선정됐지만 끝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울리지 못했던 프레디 머큐리와 몽세라 카바예의 '바르셀로나'가 21년만에 빅 이어를 들어올린 맨유를 축하했다.

 

깃을 세운 에릭 칸토나의 오만방자한 얼굴이 MGM 오프닝에서 포효하는 사자보다 강렬했던 붉은 악마. 박지성이 맨유로 이적했을 때도, 박지성의 활약보다, 더 이상 인터넷 유료결제를 하지 않아도 맨유의 경기를 볼 수 있다는 게 더 기뻤다. 우리집 FM에서 박지성은 맨유 시절 주로 포항으로 임대 보내졌다. -_-

 

그런 맨유가 망해간다. 아니.. 망했는데 반등을 안 한다. 그럼에도 나름 애정을 갖고 그 경기를 보겠다고, 새벽까지 안자고 버텼다. 불안했다. 잠을 쫓아가며 어렵게 버티고 있지만, 그 애정 어린 빨간 유니폼의 경기력이 전후반 90분이 끝나기 전에 나를 재울 것만 같았다.

 

그때 카톡이 울렸다. 이 새벽에.

 

<기자님>

 

강이슬이었다.

 

... 프리시즌 첫 경기 8점 넣었던 날은 인터뷰 하고, 두 번째 경기는 부진했다고 연락도 안했다고... 뒤끝 작렬이려나?

 

<이 새벽에 내가 안 잘 거라고 믿는 담대함...>

 

이라고 답을 보냈다.

 

답을 기대한 건 아닌데, 어차피 알게 되실 거라서, 미리 선수 친다고 했다.

 

<저 방출됐어요. 죄송해요. 많이들 기대해주셨는데...>

 

순간 잠이 확 깼다.

 


 

강이슬의 WNBA 진출이 공식적으로 언급된 건 그가 하나원큐 시절이었던 몇 년 전이다. 트레이닝캠프 계약이었다. 비록 2라운드지만 드래프트에서 선발된 박지수와는 다른 입장이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현장에서는 트레이닝 캠프 계약이지만, 사실상 로스터 진입을 약속받은 계약이라는 말도 돌았다. 당시의 하나원큐도, 지금의 KB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강이슬이 메디컬 체크에서 떨어지거나, 캠프 기간 중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한, 엔트리에는 들어갈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저도 그렇게 듣긴 했지만, 확정된 건 아니잖아요. 트레이닝캠프는 언제 어디서 누가 떨어질지 모르는 거니까, 될 때까지 살아남도록 최선을 다해야죠.”

 

공항에서도 강이슬은 신중했었다.

 

그런데 탈락이라 해도 뭔가 뜬금없다.

 

지금 이 시점에서 강이슬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던 걸까? 워싱턴 미스틱스의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정말 로스터에 3번이 없어졌다. 남아있는 이들의 이름을 봤다. 또 한 번 당황스러웠다.

 

떨어질 수는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 이 엔트리에서?

 

강이슬은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담담했다. 아니 담담하려 했다. 본인 스스로도 이 통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 전, 구단은 강이슬에 대해 최종엔트리까지 같이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프리시즌 경기인 뉴욕 원정을 준비하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갑자기 강이슬과 에리카 맥콜, 메건 구스타프슨에게 방출 통보를 했다고 한다. 세 명 모두 뜻밖이라 크게 당황했다고... 심지어 다른 두 선수에게는 뉴욕 경기를 뛰어야 하니 무리하지 말라며 하루 전날 쉬라는 말도 했단다. 뉴욕 리버티에 부상 선수가 많아 프리 시즌 경기가 취소됐다는 것 같은데, 뭔가 갑자기 예정에 없던 조치가 나온 느낌이다.

 

에이전트에게도 사전 통보가 없었다. 강이슬은 자신이 어떤 부분이 부족해서 엔트리에서 제외된 것인지 이유를 듣지 못했다. 동료 선수 2명과 함께 통보를 받았지만,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강이슬 입장에서는 에이전트 없이 익숙지 않은 영어로 통보를 받은 것이다. 슈터라고 데려왔는데 슛을 못 던지니 그렇게 된 것 같다고 스스로에게 이유를 만들고 있었다.

 

본인 스스로도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첫 경기에서도 좀처럼 패스를 받기 어려웠지만, 4쿼터에 3점슛 2개 포함, 8점을 넣었다. 그런데 두 번째 경기에서는 첫 경기보다 더 패스가 없었다. 오픈 찬스를 만들어도, 심지어 상대 수비가 미스로 자신을 버려서 찬스가 나도, 그걸 보고도 패스가 오지 않았다고 한다. 연습 때는 패스를 주면서 스크리메이지나 시합 때는 달랐단다.

 

박지수의 경기, 그리고 연습 때, 봤던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아주 생경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코칭스태프가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연습 경기 두 경기 만에 방출 통보를 한 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미국 현지 전문가들에게도 의외인가 보다.

 

오히려 강이슬의 약점이라고 우려했던 수비에서는 감독과 코치도 칭찬을 했다고 한다. 수비 미스 없고 이해력 좋다고 칭찬을 받았단다.

 

슛 쏘라고 데려온 선수인데, 생각보다 수비를 못하지 않는다는 게 플러스가 됐을 거 같지는 않아요. 슛을 못 던진다고만 판단한 거 같아요.”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괜찮은 척 하면서도 감정이 정리가 되지 않아, 지금 딱히 뭐라고 길게 말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강이슬도 조금 진정되면 그때 말씀드리겠다고 했다.

 

팬들에게도 미안해 했다. 그의 출국을 배웅하러 적지 않은 팬들이 인천공항에 나왔었다. 시간을 맞추지 못해 헛걸음을 한 팬들도 있었다. 그런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미안함도 전했다.

 

대화 내내 속상하다는 말을 참 많이 했다.

 

2012년 드래프트 1순위로 뽑힌 이후 지난 10년간, 강이슬이 속상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팀 성적, 개인 성적, 슬럼프, 부진, 특정팀 상대로 약한 모습 등 지적이 있었던 각종 사안이나, 지난 해 FA 이적과정에서 자신에게 따라왔던 당황스런 색안경에 대해서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말을 할 듯 할 듯 아낀 부분에서는 농구는 물론 그 외적으로도 감수해야했던 텃세, 차별에 대한 고충도 배어 있었다.

 

저는 두 주 하면서도 몸과 마음이 이렇게 힘든데, ‘이걸 다 버티고 견디면서 생활한 ()지수는 얼마나 힘들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안쓰럽기도 하고,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에이전트는 미국에서 계속 도전하자고 했지만, 강이슬은 그럴 마음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솔직히.... 힘들어요라고 하는데, 참 많은 감정이 느껴졌다.

 

농구 선수로서 평생의 꿈이자 목표였던 기회. 처음 트레이닝 캠프 계약을 맺은 후, 코로나19 등으로 시점이 밀리면서 3년 만에 잡은 자리. 그런데 불과 두 주 만에, 그것도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 기회가 사라졌다. 상실감을 헤아리기가 어렵다.

 

그런 와중에도 "후회는 없다"고 했다. "조금 더 해 볼 걸"같은 아쉬움도 없단다. 굳이 찾자면, 베스트 컨디션의 건강한 상황에서 캠프를 치르지 못한 것일 뿐,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고 했다. 확실히 강한 선수다.

 

LA로 이동해서 잠시 머물다가 귀국한다고 한다. 어디든 돌아다녀보겠다고 한다. “잘 털어내고 돌아가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에게 게티 센터를 추천했다. LA에서 어딘가 한 곳만 보고 와야 한다면, 그래도 그리니치보다는 게티 센터가 낫지 않을까... 그 정원에서 내려다본 다운타운은 뭔가 가슴을 털어내 주는 것 같았다. 내가 느꼈던 그 기분, 그도 똑같이 느끼고 위로 받을 수 있기를...

 

그 와중에 맨유는 또 졸전이었다. 오늘은 빨간색이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든다.

 

강이슬 파이팅! FIBA 월드컵에서 3점슛 100개 넣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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