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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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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은행이 챔피언결정전에서 지는 걸 보고 싶다

 

우리은행이 통합 5연패를 했을 때였나? 마지막 3차전을 보다가 이런 말을 했었다. 심지어 우리은행 축승회에서 위성우 감독과 전주원 코치 면전에서도 똑같이 말했었다.

 

뭐랄까? 그 해의 우리은행은 그냥 악마 같았다. 국내 선수들의 구성과 조직력도 리그 정상이었는데 여기에 외국인 선수가 존쿠엘 존스와 모니크 커리였다.

 

우리은행의 가장 큰 강점은 높이와 체력이었다. 상대보다 높았고, 오래 버텼다. 여기에 강력한 수비 조직력, 그리고 고비에서 흔들리지 않는 타짜가 여럿 포진해 있었다. 이 팀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승아의 은퇴, 양지희의 은퇴에도 팀은 버텼다. 양지희가 빠진 자리에 김정은이 들어오며, 확실한 센터는 사라졌지만, 전체적인 빅 라인업은 유지됐다.

 

임영희가 은퇴하던 그 시즌, 우리은행도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통합 6연패가 끝났다.

 

남자 농구는 우승 후에 1년을 쉰다거나, 그런 탱킹 같은 게 가능한데, 여자 농구는 그게 안돼요. 계속 좋은 성적을 내던 팀이 한 번 미끄러지면, 다시 올라오기 위해서는 바닥을 쳐야 합니다.. 그게 시간이 정말 많이 필요해요.”

 

통합 4연패를 했을 즈음, 위성우 우리은행 감독이 했던 말이다. 위 감독은 그래도 신한은행이나 되니까 정상에서 내려오고 3년을 버틴 거라며 우리는 한 번 주저앉으면 거기서 끝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통합 6연패에서 우승의 역사가 멈췄던 우리은행은 끈질기게 버텨냈다. 왕조의 역사를 쓸 것 같았던 KB를 밀어내고 정규리그를 2연패했다. 물론 챔프전까지 오르지는 못했다. 한 번은 코로나19로 시즌이 조기종료됐고, 작년에는 플레이오프에서 4위 신한은행에 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은행의 해가 저물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작년, 삼성생명과의 챔프전 3차전에서 일찌감치 승패가 갈리며, 주축 대부분이 벤치에서 팀의 패배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은행으로서는 참으로 낯선 장면. 하지만 만감이 교차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시리즈를 리셋하고 다시 붙는다면 우리은행이 이길 거라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번 시즌. 위성우-전주원 체제가 우리은행에 세워진지 딱 10년째 되는 해. 가장 큰 라이벌 KB는 강이슬을 영입하며 더욱 수준을 높였다. 정규리그를 압도했다. ‘대항마라는 말이 존재하던 자리에는 ‘1독주라는 단어가 가득 채워졌다. 시즌은 계속됐고, 결국 시즌의 마지막 왕좌를 가리는 자리에서 우리은행은 KB와 마주했다.

 

위성우 감독 부임 후, 챔프전에서 두 번 KB와 만났던 우리은행은 두 번 다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정규리그에서 KB가 더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나서는 처음 만나는 챔프전이었다. 상대 전력에서 KB가 앞선다는 평가 속에 치러지는 챔프전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花無十日紅權不十年

 

우리은행은 지난 챔프전의 역사에서 자신들이 KB를 이겼던, 그 방법 그대로 무너지고 있었다.

 

높이에서 압도됐고, 처음부터 기세에서도 밀렸다. 체력적인 열세도 두드러졌다. 3차전, KB가 기습적인 압박을 통해 우리은행 가드의 턴오버를 이끌었다. 왕조 시절, 우리은행이 했던 그 모습 그대로, KB가 우리은행을 흔들었다.

 

외곽을 노리는 방법과 기습적인 수비 변화를 가져갔지만, 상대를 당황하게 했을 뿐, 승부를 뒤집지는 못했다. 2차전 중간에 나온 판정도 우리은행에게 호재는 아니었다. 경기 내용과 이러한 모든 상황은, 우리은행이 통합 6연패 시절 챔프전에서 상대를 무너뜨릴 때와 똑같았다.

 

달라진 것은 단 하나. 이제는 우리은행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주인공이었다는 것이다.

 

지친 우리은행은 대둔근 파열로 정상적이지 않았던 박지수의 높이를 감당하지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무뎌지는 우리은행의 발걸음을 상대로 KB는 잔인하게도 앨리웁 3개를 3차전에 시전 했다..

 

처음 나온 강이슬과 박지수의 앨리웁은 유려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자연스러웠다. 고급스러운 선빵이었다. 허예은의 노룩 패스에서 이어진 앨리웁은 아마도 한국 여자농구 역사상 가장 긴 거리의 앨리웁이 아니었을까? 압도적이었다. '당신들은 우리를 이길 수 없어요'라는 메시지 같았다. 어이없어했던 김정은의 쓴웃음이 상황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나온 강이슬과 박지수의 앨리웁은 다소 투박한 면이 있었다. 골밑의 북적거림으로 박지수가 제대로 된 자세를 잡기 힘들었다. 하지만 박지수는 그 마저도 림 안으로 볼을 연결했다. 우리은행에게 시리즈 종료를 선고하는 것 같았다.

 

KB는 제왕다웠다. 압도적이었고, 화려했으며, 조화로웠다. '박지수 의존'을 '박지수 활용'으로 극대화했고, '이것이 챔피언의 레벨'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기존 주축 외에, 올 시즌 뎁스가 좋아진 KB의 벤치 멤버들은 코트에 들어올 때마다 제 몫을 했다.

 

박지수-강이슬의 원투 펀치는 리그 최강. 이 위력적인 투 톱을 가장 잘 이용하는 가드 허예은의 성장. 그 투 톱으로 인해 생긴 빈 자리를 가장 잘 파고드는 김민정. 염윤아와 최희진은 듬직했고, 김소담은 박지수 없는 시간을 버텨주는 선수에서 박지수와 함께 연동도 가능한 선수로 올라섰다. 외곽 제2의 옵션은 물론, KB의 스몰라인업 투 가드 시스템을 가능하게 했던 심성영도 팀 내의 비중은 줄었지만 자기 시간에서의 역할은 충분했다. KB는 박신자컵에서부터 가능성을 보인 엄서이, 이윤미, 양지수 등이 아직 준비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청주체육관의 기자석은 원정 벤치 바로 위다. 아산이순신체육관의 기자석은 홈 벤치 위다. 그래서 시리즈 내내 우리은행 벤치의 표정이 너무 잘 보였다.

 

교체 아웃되는 우리은행 선수들의 표정은 여름 체력 훈련에서 긴 트랙을, 혹은 긴 하이킹 코스를 완주했을 때의 모습 같았다. 다시 코트로 돌아갈 수 없어 보였다.

 

챔프전에서 점수가 접전일 때도, 흐름이 다소 넘어간다 싶을 때도, KB 선수들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여유로웠다. 마치 결과를 알고 하는 것 처럼, '이 경기는 우리가 이긴다'는 자신감이 보였다. 과거, 단기전에서 우리은행 선수들이 보였던 그 표정이었다. 

 

반면, 우리은행은 급했다. 흐름이 넘어오는 시점에도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파이팅을 외쳐도 어딘가 모르게 불안함이 느껴졌다. 매번 이 정상전투에서 우리은행을 만나는 팀의 선수들이 보였던 그런 분위기였다.

 

매 경기 이른 시간부터 허리를 숙이고 무릎에 손을 대고 있는 선수들이 많았다.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정말 많이 지쳐 있었다. 사실, 우리은행 선수들에게 보기 힘든 장면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경기 중에 이런 모습이 나오는 걸, 위성우 감독이 정말 싫어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당근보다 채찍이 익숙한 위성우 감독도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박수를 보냈다. 다그침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점수가 계속 벌어지며 이번 시리즈의 승패가 사실상 확정됐던 3쿼터 후반부터 4쿼터 초반. ‘우리은행의 심장박혜진이 코트에 없었다. 마지막 승부를 걸어야 하는 순간에 우리은행이 박혜진은 벤치에 앉혀 두는 것도 정말 어색한 모습이다.

 

 

시리즈는 끝났다.

 

우리은행은 춘천에서 아산으로 연고지를 옮긴 후에도 통합 우승을 차지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아산이순신체육관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린 적은 없다. 우리은행의 아산 홈에서 최초로 우승 트로피를 차지한 주인공은 KB가 됐다.

 

이번 시즌 마지막 경기를 마치고, 복도를 빠져나가던 김정은은 수고했다는 인사에 웃으며, “KB는 뭐... 지수는... 넘사지...”라고 짧은 인사를 전했다.

 

몇 년 전, 꼭 보고 싶었던 우리은행의 챔프전 패배를 어제 드디어 지켜봤다.

 

그런데 뭔가 서글펐다. 3차전에서 KB가 이길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2차전이 끝난 후 그 예상이 빗나가길 정말 간절히 바랐다. 아마도 이 글을 다른 팬들이 본다면 또 박진호는 우뱅빠라서 그렇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뭔가 허전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우리은행은 여전히 좋은 선수들을 갖췄고, 다음 시즌에도 플레이오프 무대에 오를 것이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진정으로 우리은행 왕조의 종국을 보여준 것 같다. 지난 4년간 우리은행의 챔프전 공백기가 있었지만, 이토록 잔인하게 그 마지막을 장식한 적은 없었다

 

지난 해 플레이오프와는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이 시리즈는 리셋하고 다시 시작해도 KB의 시리즈다. 비대칭으로 진행된 일정의 문제를 언급 안 할 수는 없지만, 그 부분이 없었다 해도 결과가 바뀌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플레이오프 미디어데이에서 위성우 감독은 이렇게 말했었다..

 

"열심히 하겠지만 결국 KB가 우승하는 시리즈입니다. 아이~참! 농구 1-2년 보신 거 아니잖아요? 방법이 없어요. 그게 사실입니다. 솔직히, 대패만 안 당했으면 좋겠어요. 질 때 지더라도 농구 팬들한테 챔프전에서 농구다운 경기는 봤다는 말이 나오게 해야 하는데... KB는 그래도 그런 농구를 할 거 같은데, 우리가 그럴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서요. KB도 팬이 많지만, 우리 팬들도 있잖아요. 그 분들한테 적어도 부끄럽게 져서는 안되는데... 아무튼 열심히 준비해보겠습니다."

 

 

아산이순신체육관 한쪽에는 우리은행 우승의 역사가 나열되어 있다. 심플하고 화려함이 없는 우리은행 홈구장의 이미지는 “다른 건 됐고, 우린 농구만 잘해”라는 느낌을 과시하는 것 같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상대를 기죽일 수 있는 우리은행의 프라이드다. 하지만 이번 시리즈는 그러한 우리은행의 찬란한 역사가 현재가 아닌 추억임을 각인시켰다.

 

강한 훈련을 통해 기계와도 같은 팀 조직력을 만들어 낸 위성우 감독은 WKBL2010년대를 우리은행의 역사로 만들었다. 이제는 정말 큰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 봉착했다.

 

과거의 왕조와 같은 방법의 재건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박혜진과 김정은을 전력에서 제외하지 않는 한, 미친 듯이 달리며 체력으로 상대를 압박하던 우리은행의 농구가 바로 부활하기는 힘들 것이다. 무게의 중심은 김소니아와 박지현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해야 한다. 이들은 뛰어난 피지컬과 기능을 갖췄지만, 지혜롭게 경기를 풀어가는 스타일이 아니라, 과거의 우리은행보다는 부침이 있을 것이다.

 

반면 정상에 오른 KB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압도라는 말 외에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KB를 대부분의 팀들은 순위에서 지운다. 과거 우리은행을 그렇게 했던 것처럼, 대부분이 그 팀을 제외한 순위에서의 맨 윗자리를 노린다. 그래서 그들에게 2위는 실패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은행은 다르다. 특히 위성우 감독이 있는 한, 그들에게 2위는 결코 만족이라는 단어와 수렴할 수 없다. 전력과 다양한 변수를 고려한다 해도, 10년간 정규리그 우승 8, 챔프전 우승 6번을 차지한 감독과 팀에게 2위는 결코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허락하지 않는다. 우승 외의 순위에서도 선택적 만족을 느끼려면, 더 져야 하고 더 무너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은행에게는 다음 시즌이 더 고난의 행군일 수 있다.

 

강한 전력을 갖춘 KB는 더욱더 시너지를 내며 강해져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 5개 팀들은 더욱 더 필사적이어야 한다. 그게 정상이다.

 

화려한 대관식과 쓸쓸한 종언이 교차했던 이번 시리즈는 뭔가 또 하나의 시대가 끝나는 것 같은 느낌과 울림이었다.

 

안녕~ 나의 삼성생명 2021-22 여자프로농구 시즌’ ID카드. 한 시즌 동안 수고했다. 그리고... 시즌 내내 코로나19 안 걸린 나도 수고했다. -_-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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