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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ize/oTaku

[PLACE] 신촌 재즈필 JAZZ FE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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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訃告를 받은 느낌이었다.

 

연도는 기억나지 않는다. 12월의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말일까지 술을 찾아가라는 문자가 왔다. 사유는 폐업이었다.

 

참 바빴나 보다. 나름 신경 써야 할 메시지였지만 그렇게 흘려 보냈고, 그렇게 두어 달 지나서 문득 그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이미 그 곳의 기억은 셔터를 내린 후였다.

 

서울시 서대문구 창천동 31-39, 7층 JAZZ FEEL

 

어쩌다가 참 추억서린 이름이 되었다.

 

지하철 2호선 신촌역 2번 출구에서 연세대 정문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과거 명물거리(현재 명물길)로 빠지는 사거리가 나온다. 그때도 이 사거리에는 파스쿠찌가 있었고, 바로 뒤편에는 형제갈비가 있었다. 신촌 상권이 활발하던 시절, 주중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사람이 넘쳐나던 곳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사거리에 삼성 핸드폰(애니콜인지 갤럭시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과 피자헛이 있던 건물이 있었다.

 

지금 네이버 지도를 쳐보니, 1층에는 미그웨치 신촌점이 있는 베스트프렌드 한국어학원 건물이라고 나온다. 거리뷰로 보니 건물 사진이 이렇게 뜬다. 위 사진 속 가장 윗 층인 7층에 재즈필이 있었다.

 

처음, 나와는 거리가 있던 곳이다.

 

신촌은 고등학생 시절 놀이터였고, 대학생이 된 이후로는 학교 주변이 아니면 강남 쪽을 많이 갔다. 춤에도 관심 없고, 저열한 몸뚱이를 놀릴 재주도 없어서 나이트는 그저 양주 마시기 좋은 곳 정도로 인식하던 시절의 서식지는 주로 강남 아니면, 어쩌다 (그 마저도 지금과는 참 많이 달랐던) 이태원이었다.

 

바도 마찬가지. 원스 인 어 블루문, JJ마호니스, 닉스앤낙스... 이제는 하나 둘 추억이 되어버렸다. 가장 열심히 내 시가를 받아줬던 사람과는 이번 생에 다시 보지 않기로 약속을 했고, 모던 바에 대해 숱하게 강의를 했던 친구도 이제는 기억 너머의 얼굴이 더 익숙하다. 기분 좋은 날, 연주와 노래로 술값을 대신하는 것도 나름의 가치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참 재수없는 짓이었을 거다.

 

어려서부터 운이 퍽 좋아, 비싼 술을 공짜로 공급받는 신세가 되어 철없이 나쁜 짓을 참 많이 하던 때, 나는 그저 시가와 로얄 샬루트만 같이 제공되면 어디든 만족스러웠다.

 

군 복무와 유학을 마치고 머리 속만 질풍노도의 시기를 걷던 때, 문득 재광이 형이 자신의 아지트를 소개해줬다. 거기가 재즈필이었다.

 

오후 2시부터 새벽까지 문을 열었던 그 곳에서 참 많은 기억을 쌓았던 것 같다. 퇴근 후에 가도 스스럼이 없었고, 약속 없이 가도 낯설지 않았다. 자주 어울리던 사람들의 아지트였고, 때로는 그 외의 다른 사람과, 혹은 혼자서 시간을 잔혹하게 살해하기 위한 용도로 자주 들렀다.

 

ROYAL SALUTE 21y, JOHNNIE WALKER BLUE LABEL, GLENFIDDICH 18y, CAMUS XO, PINK SQUIRREL

 

주종이었다. 일찌감치 알콜성 지방간 판정을 받고, 위 세척 후 눈을 떴을 때 의사의 독설을 들었던 나로서는, 자주 마시는 것 보다 다음날 뒤끝 없이 깔끔한 자리가 좋았다. 그리고 재즈필은 영수증에 7자리 숫자를 아무렇지 않게 찍어주던 강남의 바에 비해 가격 또한 착했다. 남들이 좋다고 하면 따라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발렌타인은 일부러 피했다. 생각해보면 굳이 가릴 이유도 없는 것을...

 

나름의 치열함이 섞였던 시절이지만, 편했고, 좋은 사람들이 있었고, 좋은 바텐더들이 있었고, 그 시간마저 좋았다고 할 수 있겠다.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은 악명 높은 신촌에서 어떻게든 차를 세울 곳을 찾았고, 언제부턴가 간다는 소식을 전하면 바텐더의 심부름으로 번이나 초밥을 사가야 했던 적도 있었다. 바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당시 여자친구도 재즈필에 가는 것에 대해서는 퍽 관대했다.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심지어 저기서 송년회를 했던 기억도 있다.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행사였지만, 그 마저도 허락을 해줬던 곳이다. 사는 것 보다 마시는 것 만을 좋아했던 종화형은 바 의자에서 취해서 졸다가 뒤로 넘어지기도 했다. 만취해서 폭주하는 여성분을 바텐더 대신 챙기러 뛰어나갔던 날도 있었다.

 

몇 번의 리모델링과 몇 차례의 바텐더의 변화를 겪었다. 그렇게 나이를 먹었고, 그렇게 추억이 빛바랬다. 시간이 지났고, 마지막으로 받은 문자가 폐업 공지와 술을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결국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했다. 오랜 친구의 부고를 듣고도 장례식에 불참한 느낌이 뒤늦게 밀려왔다. 죄책감보다는 아쉬움. 마지막 남은 술을 찾아가지 않은 것은, 그 곳에 남겨뒀던 2~30대 시절의 손 때 묻은 기억들을 애서 소환하지 않은 것으로 하고 싶다.

 

그래도 몇 번, 아주 가끔 저 앞을 지날 때면, 습관처럼 7층을 올려다본다. 나름 신촌에서 전망이 참 좋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새벽의 신촌 거리를 내려다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었다. 하루의 번잡함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신촌의 새벽은 새로웠고 상쾌했다. 열린 공간을 눈에는 참 많이 담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도 게으름은 나의 발목을 잡는다. 

 

몇 번의 생일, 몇 번의 연말연시, 몇 번의 크리스마스, 몇 번의 명절을 저곳에서 보냈다.

 

재즈필의 폐업이라는 핑계를 대긴 했지만, 사실 그 몇 년 전부터 우리의 발걸음도 뜸했다. 그런 차에 이별을 맞았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마음 편히 시간을 의탁할 곳을 찾지 못했다. 어디를 가도 마음 편한 익숙함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우리는 아지트가 없음을, 그 이유가 재즈필이 문을 닫아서라고 했다.

 

조 아카리의 만화 <바텐더>에서 카운터 앞에 서있다면 그게 누구든 바텐더는 손님을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재즈필에서 우리가 혹은 내가 원했던 건 그저 위로였는지도 모른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받을 수 있는 위로. 비록 바테이블에서의 흡연이라는 찬란한 자유는 새로운 법에 의해 제한됐지만, 달링하버에서 시간이 멈추기를 바랐던 그 철없는 치기를, 굳이 발휘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던 최소한의 안도. 그리고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아련한 기억.

 

죽기 전 세상에 살았던 기억이 필름처럼 감긴다면, 아마도 그 컷들 속에서는 다시 한 번, 그때의 재즈필을 만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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