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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er] Yousuf Karsh / 유섭 카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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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 메인 피사체이지만, 인물을 찍으면서 인물 이상의 무엇을 보여주는 것. 감상하는 이들에게 보는 것 이상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사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고, 그런 사진을 항상 찍고 싶어한다. 하지만 인물을 중심으로 어떤 스토리텔링을 하기 위해 나는 항상 인물 이외의 부가적인 것들을 항상 많이도 나열하고 많은 의미의 부여를 인물보다 부가적인 것들에게 더 치중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여기, 인물 그 자체만으로 인물 그 이상을 담아낸 작가가 있다.



유섭 카쉬 (Yousuf Karsh)



"카쉬의 피사체가 되어보지 못했다면 명사라고 하지 마라."


세계적인 인물사진의 거장으로 이름 높았던 그의 명성을 대변하는 말이다.

 

1908년 아르메니아의 말딘에서 출생한 카쉬는 어린시절 터키인들로부터 박해받는 약소민족의 고통과 더불어 대량학살을 목격했다고 한다. 


전쟁 중에는 은닉처의 적막과 죽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목도해야했고, 17일 굶으며 사막을 가로질러 캐나다로 도망가는 경험을 겪었다고 한다.


터키인들의 박해를 피해 시리아에 살고있던 카쉬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외숙부 조지 나카쉬(George Nakash)가 경영하는 사진관이 있던 캐나다로 가게 되었다. 외숙부의 사진관에서 사진을 공부하기 시작한 카쉬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고, 이러한 그의 능력을 간파한 외숙부는 보스턴에서 인물사진 스튜디오를 경영하던 존 가로 (John Garo)에게 카쉬를 보냈다.


카쉬와 같은 아르메니아 인이었던 존 가로는 카쉬에게 조명과 디자인, 그리고 구성에 대해 가르쳤으며, 램브란트나 벨라스케스 같은 위대한 화가들의 작품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카쉬는 존 가로의 스튜디오에서 화가들이 인물화를 그릴 때 사용한 빛의 각도와 밝기, 그리고 대비등을 공부하게 되었고, 인물을 보는 법, 조명을 사용하는 법은 물론, 인화법까지 다양한 것들을 상세하게 수학하게 되었다.


조명 사용이 자유롭지 않았던 당시에, 존 가로의 스튜디오는 일몰 후 예술가들의 살롱이 되었고, 카쉬는 이 시간을 통해 1920년대의 음악, 문학, 연극, 오페라에서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며, 이런 인물들의 사진을 찍는 작가가 되기로 했다고 한다.


1931년 캐나다의 오타와로 이주하여 개인 스튜디오를 차린 카쉬는 정기간행물의 편집장이었던 B.K.샌드웰을 알게 되며, 그로부터 정치와 정치인의 속성과 태도, 목표와 이상향에 대해 듣게 되었다. 아마추어 극단의 연극인들을 촬영하며 인물 사진을 공부하던 카쉬는 소극장 주연 배우 중 한 명이던 던캐넌 경의 도움으로 당시 총독이었던 그의 부모의 사진을 찍게 되었고, 이 사진이 각종 잡지와 캐나다 전역의 신문에 실리며 명성을 알리기 시작한다.



1936년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캐나다 수상인 맥켄지 킹과 협상을 위해 퀘백을 방문했을 때, 캐나다 수상과 정부 요원들의 사진을 담당하는 포토그래퍼로 특별 초빙된 카쉬의 사진은 이 때에 TV 뉴스에 처음 등장하게 됐다. 그리고 이후 맥켄지 수상은 카쉬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맥켄지 수상의 후원으로 카쉬는 1941년 12월, 캐나다 오타와에서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의 사진을 촬영하는데, 이 사진이 <LIFE>지의 표지를 장식하며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카쉬는 영국에 초청되어, 조지 6세를 비롯하여 영국 왕실가족 42명의 초상을 찍은 것을 비롯, 1945년에는 <LIFE>지의 위촉으로 세계 명사들의 초상 사진을 찍었다.


이후 카쉬는 다양한 인물을 촬영하며 자연광이 가장 중요하며, 가장 중요한 광선은 태양과 같은 방향임을 깨달아 다양한 조명법을 사용하며 인물 사진을 찍는다. 


1992년 자신의 스튜디오를 접고 상업적 작업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그는 작품 활동을 통해 수많은 명사들의 모습을 남겼고, 2002년 작고할 때까지 1만 5천여명을 카메라에 담았고, 15만장에 달하는 필름을 인화했다.


지금도 여전히 인물사진의 교과서로 불리고 있는 카쉬는 피사체인 인물의 내면까지도 그대로 표현해 낸다 하여 '영혼을 찍는 사진 작가'로 불렸다. 스튜디오 조명을 자연광과 조화시켜 인물을 부각시킨 그의 조명기술 역시도 현대 사진 조명 업계에서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고 있다.


성난 표정의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 앞에서도 셔터를 누르기를 굴하지 않았던 그를 두고 처칠은 "으르렁 거리는 사자를 앉혀놓고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람" 이라고 높게 평가했으며, 사진 찍는 이들의 로망이었지만 자신을 피사체로 쉽게 허락하지 않았던 괴짜 화가 피카소 역시 그의 사진에 주인공이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마음이야말로 사진가의 진정한 렌즈다. 인물이 나를 끌어드리는 순간의 찬스를 놓쳐서는 안된다."


카쉬는 인물의 포트레이트 그 자체를 통해 인물의 내면 자체를 끌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보였고, 사람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인생을 나타내준다고 생각한 손을 찍는 것에도 애정을 담았다.





1941년 촬영한 윈스턴 처칠의 초상.
다소는 심술궂지만 고집있는 인상은 제2차 세계 대전을 이끌던 연합군 대표 수장의 강인함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 사진은 가장 많이 카피된 인물 사진이기도 하다.



은막의 주인공이었던 시절부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너무나 아름다웠던 오드리 햅번.
1956년 이 사진을 촬영하며 카쉬는 그녀에게서 '상처받기 쉬운 예민한 내면'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아프리카의 성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1954년에 찍은 이 사진의 디테일은 보정을 거친 현대 사진보다도 더 뛰어난 현실감을 표현하고 있다.


There is brief moment when all there is in a man's mind and soul and sprit is reflected through his eyes, his hands, his attitude. This is the moment to record.

It is part of the elusive secret that hides in everyone, and it has been my life's work to try to capture it on film.

My quest has brought me great joy. My desire was to portray, to interpret, to record the human spirit, the human s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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