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이 드디어 무관의 한을 풀었다. 우리 시간으로 22일 새벽, 스페인 빌바오의 산 마메스에서 열린 2024-25 UEFA 유로파리그 결승에서 토트넘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1-0으로 이기고 우승했다. 토트넘의 주장 손흥민은 후반, 교체로 투입되어 경기를 소화했고, 우승의 주역으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유럽에서 우승컵을 든 최초의 한국인 주장이 되었으며, UEFA 주관의 큰 대회에서 트로피 세리머니를 펼치는 감동을 선사했다.
한국인이라 참 다행이다. 맨유 팬인 내가 이 경기에서 느낀 긍정적인 부분은 손흥민의 서사가 전부다. 한국인이 아니었다면, 새벽에 낭비한 2시간은 오롯이 쓰레기같았을 것이다.
경기는 졸전이었다. 원래 토너먼트의 결승은 양 팀 모두 몸을 사리는 경우가 많기에, 경기력이 폭발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기대 이하의 내용이 훨씬 많다. 하지만 이를 고려해도 양 팀의 경기력은 정말 유럽 대회 파이널이라 하기에는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자국 리그에서 괜히 16위-17위를 하고 있는 팀들이 아니다. 강등권 제외하면 최하위 두 팀이 유로파 정상을 다투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상황이니, 결승전임에도 ‘멸망전’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나마 토트넘은 트로피라도 들었으니 면피라도 할 수 있지만, 맨유는 무엇 하나 건질 게 없는 경기였다.
'무력한 방패'를 뚫지 못하는 '무딘 창'의 맞대결이었다. 양 팀 모두 수비가 견고하지는 않지만, 그런 상대를 뚫을 공격력이 존재하지 않는 토트넘과 맨유다. 따라서 첫 골이 중요했다. 맨유는 전체적으로 주도권을 가져갔다. 토트넘이 전략적으로 움츠렸다가 역습 한 방을 노렸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나마 브루노 페르난데스와 카세미루가 있는 맨유의 중원의 경기 운영 능력이 한 수 위였기에 펼쳐진 구도로 보는 게 더 적당하다.
다만 맨유는 초반부터 볼 소유는 길었지만 효과적이지 못했다. 측면은 다이내믹하지 못했고, 시즌 내내 졸린 수준의 결정력을 보여준 최전방은 이 경기까지도 놀라운 일관성을 과시했다. 그런 가운데 베테랑 미드필더들의 과감함도 없었다. 적극적인 공격가담이나 과감한 중거리 슛도 없었다.
그러다가 첫 골이 당혹스럽게 나왔다. 끝내 브래넌 존슨의 득점으로 인정됐지만, 누가 봐도 루크 쇼의 자책골이다. 인상적이지 않은 득점이었고, 우스운 실점이었다. 그냥 시즌 내내, 한심한 축구를 펼친 맨유에게 한 경기로 모든 걸 상쇄하려는 도둑놈같은 심보를 부리지 말라고 내린 천벌같은 골이었다. 코미디같은 이 골이 나오지 않았다면 120분간 0-0으로 끝났을 것 같다.
아무튼 존슨의 득점이 나온 건 전반 42분. 놀랍게도 맨유의 경기 방식은 실점 이전이나 이후나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전반에 아마드 디알로의 슛이 골문을 벗어났고, 후반에는 상대의 실책으로 라스무스 호일룬이 빈 골대로 밀어 넣은 헤딩이 미키 판 더 벤에게 막혔다. 종료 직전 루크 쇼의 '속죄 헤딩슛'은 굴리엘모 비카리오가 막아냈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면 뭔가 공세를 이어간 거 같지만, 75%에 육박하는 점유율과 16개의 슈팅을 때렸음에도 기억 나는 장면 3개에 무득점이라면 할 말은 다 한 것이다. 데이터상으로는 일방적으로 보이는데 xG값은 1 미만이다. 얼마나 지루하고 무의미한 축구를 했는지 보여준다.
토트넘이 5백까지 내려서는 모습을 보이자, 맨유는 좀처럼 공간을 찾지 못했다. 이제 맨유에는 내려 앉은 상대를 무너뜨리는 슈퍼스타도 없으며, 원투로 좁은 틈에서 기회를 만들어 내는 조직력도 없다. 한쪽으로 수비를 끌어놓는 것 까지는 성공해도 반대편으로 길게 넘어가는 전환은 수준 이하였다. 기울어진 수비가 정상적으로 복귀하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고, 하물며 넘어가는 롱 패스의 정확도도 부정확했다. 딱, 리그 하위권에 어울리는 축구였다. 지루하고 단조로웠다. 수비수 해리 매과이어를 올려서 공중볼 싸움을 시키는 걸 주요 공격 옵션으로 활용할 수준이니, 기대할 게 없는 팀인 거다. 4강에서 그게 로또같은 결과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그런 우연이 두 번이나 연달아 일어날 리 없다. 고육지책을 플랜B로 쓰는 팀에게 희망이 있을 리 없다.
팀의 '유일한 월드클래스'라 할 수 있는 브루노 페르난데스에게는 이 팀의 주장 완장이 너무 버거워 보인다. 유로파리그에서 나름 고군분투했다고 역성을 들 수 있겠지만, 그냥 ‘킥 좀 되는 주요 선수’이자, ‘암흑기에 볼 좀 찼던 선수’ 이상의 평가는 힘들 것 같다. 브라이언 롭슨 이후, 스티브 브루스, 에릭 칸토나, 로이 킨, 게리 네빌, 네마냐 비디치 등 맨유를 지킨 주장들이 경기력을 떠나 그라운드에서 보여줬던 지배력 자체를 생각해보자면, 브루노 페르난데스는 감히 명함도 꺼낼 수 없는 수준이다. 역대 맨유 최악의 주장이 아닐까 했는데, 생각해보니 애슐리 영이랑 안토니오 발렌시아가 있었다. 매과이어도 브루노 페르난데스랑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주장만 문제가 아니다. 사실, 문제가 아닌 걸 찾는게 더 어렵다. 대체 주전이 누군지도 모르겠는 센터백 조합도 역대 최하 수준이고, 최전방 공격진은 테디 셰링엄, 루드 반 니스텔루이, 웨인 루니,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등이 거쳐간 10번이 현재 공석이라는 점에서 얼마나 한심한지를 증명한다. 맨유의 상징과도 같은 7번은 발렌시아가 단 이후 바이러스에 걸린 것처럼 영향력을 잃어버렸다.
토트넘이 이길만한 축구를 하지는 않았다. 다만, 맨유는 질 만한 축구를 했다. 둘 다 못했는데, 축구의 신은 어이없는 한 골을 통해 토트넘보다 맨유의 축구가 더 꼴보기 싫고 지리멸렬했다고 심판했다.
클럽의 역사와 자부심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하찮은 축구로 더 이상 나쁠 수 없는 최악의 시즌을 마친 맨유는 미래도 그다지 밝지 않다. 유럽 대회를 못 나가는 리그 하위권 팀이 되면서 수익에서 된서리를 맞는 것도 이유지만, 나름 ‘합리적 경영’을 표방하는 새 구단주 짐 랫클리프 경의 구단 운영 방식을 보면 획기적인 변화는 기대하기 힘들어 보인다. 팀을 쓰레기로 만든 글레이저 가문의 원죄가 워낙 크지만, 그들에 의해 죽어가는 공룡이 된 맨유를 ‘합리적’으로 경영하고자 했다면 대체 뭐하러 인수한 건지 모르겠다.
2025년 5월, 현재의 맨유는 지루하고 단조로운 축구를 펼치는 팀이며, 그런 가운데 결과도 엉망인 한심한 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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